하얀 찔레꽃이 어느새 소리 없이 져버렸다. 미처 향기를 맡아볼 새도 없이. 그 향기가 너무 슬프다며 누군가 목 놓아 노래하던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은 홀연히 그 자취를 감추었다.

찔레꽃이 지면서 여름은 시작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해도 한낮 온도는 이제 30도를 육박하고 있다. 드디어 온갖 생명의 잔치가 시작된 것이다. 좋게 말해 잔치고 다른 면으로 본다면 산 것들의 본격적인 각축전이 벌어진 셈이다. 인간의 손을 탔든 그렇지 않든 저마다 먹이를 탐내며 생명의 본능을 절정으로 올리고 있다. 풀들은 풀대로 한 뼘도 안 되는 땅에 몸을 비집고 들어앉아 서슴없이 길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 풀마다 온통 벌레투성이다. 

풀들을 벌레들이 갉아먹고, 그 벌레들을 또 다른 벌레들이 잡아먹고, 그것들을 새들이 잡아먹고, 사람은 그 온갖 것들을 폭식하는 먹이사슬의 행렬이 막을 올린 것이다. 그 적나라한 먹고 먹히는 관계의 순환이 비단 경이로워 보이지만은 않다. 솔직히 두렵기까지 하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는 것을 부담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에게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유서에서 내던진 그 한마디, ‘삶도 죽음도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 말이 생각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포도밭에서 일하는 내내, 그 말을 남기고 바위 위에서 몸을 내던진 그가 생각났다. 삶을 버리는 순간, 그의 심경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눈물을 뱉어냈다.

그는 과연 초탈의 심정으로 이승을 등졌을까? 그의 말대로 삶도 죽음도 하나요 일체며, 자연의 한 부분이라 나도 그리 믿는다. 하지만 자신의 생을 다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조건에 떠밀려 고단한 삶을 내려놓은 그에게는 다분히 변명 이상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는 나에게 애증이었다. 대통령 후보에 그가 나섰을 때 우리 가족은 꽉꽉 채운 딸아이의 돼지저금통을 통째로 들고 그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때 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저 아저씨를 보렴. 사람이 남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할 때 이제 학력이나 집안의 배경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세상이 오게 될 거란다.” 
원칙과 상식이 똑바로 서는 나라, 권위주의 시대와 결별하고 확고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나라를 위해 그가 대통령으로서 걸어 나간 길은 나에게도 가슴 벅찬 감동을 주었다. 그런가하면 FTA 등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너무 쉽게 편승하려 했을 때, 그리고 정치권의 이합집산으로 낮은 지지율을 벗어나려 했을 때 나는 그를 멀리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나의 비판에는 솔직히 일관성이 없었다.

그 이름 석자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자극적인 것이어서 나는 내 기준을 잃고 그를 헐뜯는 사람 앞에서는 그를 옹호했으며, 그를 칭찬하는 사람 앞에서는 너무 집착하지 말라며 꼬집기도 했다. 사람 참 간사하지 않은가. 그만큼 그의 존재감은 컸다. 우리가 만들려는 새로운 사회를 그는 그의 삶 모두를 통틀어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퇴임한 지 1년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사람을 몰아치더라도 퇴로라도 만들어 놓고서 일을 벌여야지 막다른 골목으로 무작정 몰고 가다니, 그것도 얼마 전까지 대통령이었던 사람을 말이다. 이 나라의 일부 세력은 탄핵 때 국민들의 반발로 성공시키지 못했던 일을 퇴임 후 사람을 마구잡이로 흠집을 내며 기어이 일을 냈다. 이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나라의 미래를 앞장 서 개척할 수 있다는 선례를 그들 특권층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시골로 내려와 고향 사람들과 어울려 다함께 농사짓고 뒷산 지키는 환경운동을 하겠다던 그 평범한 꿈조차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다시 포악하고 잔인한 들개들의 사육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치열한 여름 속에서 생물들은 살기 위해 다툴 것이며 죽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 그 여름이 간 후 어느 때가 오면 왜 그토록 땀을 뻘뻘 흘려대며 험하게 살아야 했는지 반성의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 또한 자연의 섭리라면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 밀짚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타시던 당신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부디 편안히 쉬십시오.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작권자 © 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