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농촌에 비해 인간과 자연의 직접적인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이를 가로막는 온갖 장치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로 출근해 지하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 사무실로 들어가고, 점심은 지하 구내식당에서 해결하고, 그리고 퇴근하면 다시 지하철로 집에 오고…. 일상은 TV, 인터넷, 개인휴대용멀티미디어 등 각종 미디어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으니 특별한 관심이 없으면 하늘이 맑은지 흐린지 비가 오는지 느끼기가 어렵다. 

나의 경우, 농사를 시작한 후 그 전보다 날씨 변화에 민감해졌음을 느낀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오늘은 술 마시기 좋은 날’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곤 했는데, 이제는 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것은 내가 시골에서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생물들의 일상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 한번 흠뻑 맞은 후 하루 새 몰라보게 커버린 작물들의 모습에서 농사란 결국 하늘이 주도하고 있으며, 인간은 작물과 하늘을 매개하는 소통의 중개자임을 느끼게 된다.   

비를 맞은 포도나무들마다 손톱만한 크기의 포도송이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이 친구들은 앞으로 몇 개월이면 열배 백배 제 몸을 키울 것이다. 탐스러운 빛깔로 탱탱하게 알이 꽉 찬 송이가 될 때까지는 여러 번의 고비도 겪게 될 것이다. 꽃이 지고 나서 노균병에 걸려 알들이 힘없이 후드득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고, 한참 익어야 할 늦여름에는 갈반병에 걸려 잎사귀들이 누렇게 물드는 바람에 제대로 익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잘 익었어도 미처 수확을 하지 못한 사이에 벌레들이 먼저 그 상큼하고 달콤한 과즙을 죄다 빨아 먹는 최악의 불행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개화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무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예방약이 필요하다. 무농약 농사를 짓고 있는 내가 포도들에게 주는 약은 석회보르도액, 발효현미식초, 목초액 등이다. 영양제로는 당귀, 감초, 계피에 막걸리와 소주를 넣고 발효시킨 한방영양제와 작년에 수확했던 포도로 만든 포도효소, 쑥 등을 넣고 담근 천혜녹즙 등이다. 숙기촉진을 위해 바닷물을 발효시켜 8월에 집중적으로 서너 번 뿌려 주기도 한다.

작년에 석회보르도액은 수확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다섯 차례 뿌려주었고, 현미식초와 목초액을 섞어서 열흘에 한번 꼴로, 각종 영양제 역시 열흘 간격으로 뿌려주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살균에는 큰 효과가 있었고, 나무들 수세 역시 좋았다. 문제는 살충에 있었다. 잘 버티다가 수확기를 앞둔 8월말이 되자 벌레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잘 익은 포도에서 우러나는 달콤한 향기가 그들을 유혹했을 것이다. 더구나 인근 포도밭들은 모두 농약을 치니 당연 우리 밭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정도 앞당겨 포도수확을 했고, 20% 정도는 벌레피해로 내버려야 했다. 수확한 포도들은 진하게 즙을 짜 지인들을 통해 직거래로 모두 판매했다. 물론 벌레들을 막아냈다면 더 나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겠지만 포도농사 첫 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주 좋은 경험을 한 셈이다. 무엇보다도 무농약 유기농 포도재배의 가능성을 직접 확인했다는 것이 나로서는 중요한 교훈이었다. 
 
작년에 수확할 때 이웃들은 신기해했다. 농약을 안치고서도 포도를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이들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내가 친환경 포도농사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이웃들도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올해는 벌레 예방에 대한 지난해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고민 중이다. 봉지를 씌우되 햇볕의 적외선을 그대로 침투시켜 숙기를 촉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

비록 일천한 경험이긴 해도 농사에 대한 나만의 개념이 싹트고 있음을 느낀다. 당장 한 해 농사에서 많은 열매를 팔아 최대한의 수익을 내는 것보다 나무를 건강하게 키우고 장기적으로 좋은 흙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뿌리가 맘껏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건강한 토양을 만들어주고, 나무가 짊어질 부담을 최소화해 왕성하게 생리작용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면 나무와 인간 간의 공존공생이 가능해질 것이다.

공존의 전제는 상대방의 존재와 입장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관계는 머잖아 깨지게 된다. 이것은 비단 인간관계에서만 적용되는 문제는 아닐 것 같다. 나무에게도 자연에게도 그들을 생명체로 인정하고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파트너로 대우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건강한 삶은 건강한 자연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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