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에 들어섰다. 산골 여기저기서 철쭉이 붉게 빛나며 요동을 친다. 시나브로 만물의 생명력이 약동하고 있다. 온갖 생명들은 살아있음에 기뻐 춤추고 씨앗을 잉태하여 본연의 삶에 충실을 다한다.   

고추모종을 심기 위해 텃밭을 다듬는데 민들레 하나 눈에 띄었다. 꽃은 이미 졌으나 씨방 가득한 홀씨들은 이제 자유롭게 세상을 주유할 준비가 된 모양이다. 시인 박노해는 민들레를 가리켜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꽃으로 살지 말자고,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 흔하고 너른 꽃 속에서 자연스레 빛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자’며 노래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에도 이맘때면 민들레가 보이곤 했다. 콘크리트 바닥 갈라진 틈새로 온몸을 밀고 올라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잔뜩 생채기가 났어도 기어이 씨앗을 터뜨리는 모습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사람들은, 아마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 풀 하나, 지나다니는데 거치적거릴 뿐 사람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될까?’ 바닥에 잔뜩 웅크려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으면서도 끝까지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민들레의 모습에 사람들은 한마디로 찡했을 것이다.  

모든 사물은 보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지식은 오히려 이해관계와 편견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일쑤다. 콘크리트 바닥 위 민들레 하나, 누구 눈에는 지저분하고 하찮은 쓰레기로 보일 것이며, 또 다른 누구의 눈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 사람은 민들레의 입장이 되어보려 하지 않을까? 하기야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기도 어려운 사람들한테 어찌 한낱 풀 한포기를 이해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인 우리 큰 아이에게 내가 가장 많이 읽어주었던 동화책은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똥’이다.

어느 강아지 한 마리가 무심코 길가에 싸 놓고 간 강아지 똥 한 덩이. 여기저기서 버림받고 구박받으며 굴러다니던 강아지 똥은 절망한다. ‘난 역시 아무데도 쓸모없는 찌꺼기인가 봐’. 아무 곳에도 필요치 않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며 외롭게 겨울을 보내고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강아지 똥은 민들레홀씨를 만나고 드디어 자신이 온전히 쓰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게 된다. 그리고 기쁜 맘으로 민들레의 거름이 되어준 강아지 똥의 사랑과 희생으로, 화창한 봄날 어느 골목길에서 노랗고 아름다운 민들레꽃이 피어나게 된다.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아이에게 처음 읽어주던 때, 스스로 느꼈던 감동을 잊지 못한다. 뭐랄까, 아주 정갈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할까.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저마다 존재의 가치가 있으며 그것이 새로운 생명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그 책의 내용이 나에게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지금 다시 마주한 민들레의 모습을 보며 나는 농부의 삶을 견주어 본다. 우리네의 삶 역시 강아지 똥, 민들레와 크게 다를 바가 있을까? 지금의 인간세상에서 끊임없이 무시당하며 밑바닥을 기어야 하는 하찮은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과 동병상련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멀쩡한 강과 산을 마구 파헤쳐 뭇 생명들을 짓밟는 자들의 눈에는 그 땅을 개간하여 사는 무지랭이 농사꾼들 역시 존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길거리에 데굴데굴 굴려 다니는 강아지 똥의 입장이 되어보고, 빌딩 숲에서 기어이 살아남아 씨를 퍼뜨리는 민들레의 처지도 되어보고, 한 줌의 양식이라도 마련키 위해 고된 노동을 감내하는 농민의 처지에 서보면서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헛된 꿈에 불과할까? 돈과 권력과 학력의 기준 대신 생명과 조화와 공생이 세상을 사는 기준이 된다면, 무작정 성공만을 좇는 대신 주변에 배려하며 산다면 세상 살기는 더 좋아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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