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무르익고 있다. 불규칙한 날씨 속에서도 블루베리 묘목들은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으며 감나무, 호두나무, 매실, 사과 등 농장 곳곳의 유실수들도 활개를 펼치고 있다. 포도나무 가지에서 삐죽삐죽 솟아나오는 발그레한 새싹들도 수줍음을 떨치고 과감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작년에 옥수수를 심었던 밭에 올해는 지황을 심었다. 지황은 강장과 빈혈 등에 좋다고 해서 한약재의 주요한 원료로 쓰이는 작물이다. 종근을 인근 금산에서 구했는데 마르거나 상하기 전에 빨리 심을 필요가 있었다. 별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얻어야 했다.

시골살이를 처음 시작할 때, 내 품을 팔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품도 사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이유는 첫째, 시골에서까지 사람이, 사고 팔리는 거래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문이 있었고 둘째, 가장 중요한 노동력에서 자급을 이루지 못하면서 자립의 삶을 걷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작년에 딱 한번 남의 품을 얻은 일이 있었다. 장마를 앞두고 포도 비가림용 비닐을 쳐야 하는데 도저히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그때는 마을 사람들도 다들 바빠서 동네에서 품앗이로 해결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읍내 용역사무실에서 아저씨들 두 분을 모셔다가 같이 일을 했는데 결과는 씁쓸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분들 눈에는 신출내기 초보 농사꾼이 참 만만해 보였을 것이다. 일은 대충대충, 품삯은 술값에 목욕비까지 보태 받아갔다. 화가 많이 났지만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외지에서 와서 겪어야 할 의례적인 일로 생각했으며 이 모두가 자업자득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 지황을 심으면서 두 번째로 품을 얻게 됐다. 동네 형님을 통해 아랫마을에 사시는 부부를 소개받았다. 남편은 50대 초반, 아내는 그보다 열 살쯤은 젊어보였다.

두 사람 다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황 심는 일은 처음이었는데도 오랫동안의 농사일에서 다져온 공력이 있었기에 쉽게 일을 풀어 나갔다.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그들은 이 일을 정말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듯 했다. 부부가 워낙 성실하게 일을 해준 덕택에 지황 식재는 하루 만에 모두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들 부부는 항상 일을 같이 한다고 했다. 3천여 평의 포도밭도 둘이 같이 한 골씩 타나가며 짓고, 인근 산에 나무 심으러 가는 품일도 부부는 항상 짝이 되어 일을 나간다. 이번 지황 심는 일도 그랬다. 두 사람이 마주보며 양쪽에서 같이 일을 해나갔다. 남편이 손이 좀 느려진다 싶으면 그 공백을 아내가 메워가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일을 하는 틈틈이 나오는 대화도 자연스럽다. 이웃들과의 관계, 올해 농사에 대한 계획,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부부는 지황을 심으면서 ‘이눔들 잘 자라라’고 한마디씩 덕담을 보태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실 사람이 할 일이라는 게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애네(작물)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커지려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단지 걔네가 잘 자라게 도와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 아이에게 학원을 다닐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우리나라의 상위계층은, 그들이 보기에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자연에서 스스로 터득한 지혜와 슬기를 갖춘 훌륭한 분들이 많다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시골에서 부부가 함께 일하는 모습이야 흔하디흔한 일상사이지만 이들처럼 품 팔러 나갈 때를 비롯해서 이러저러한 일에 줄곧 같이 나가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더구나 남편과 아내 사이에 격의 없이 편하게 대화가 이어지며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더 드물다.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은 부부가 아침에 헤어져 직장을 마치고 저녁때나 다시 만나게 된다. 둘 중 한사람이 야근이나 술이라도 한잔 하게 돼서 밤늦게 들어가면 하루 종일 대화 한번 못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도 다반사다.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가 부족하다 보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폭도 갈수록 줄어들고, 사소한 문제에도 티격태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이들 부부의 사는 모습이 처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주말에 호미 한 자루 씩 들고 텃밭농사라도 지으면 어떨까. 서로 마주보며 일을 하고,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눈다면 산다는 게 가끔씩은 즐거울 때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농사는 역시, 매력적인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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