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穀雨)에 비가 내렸다. 대충 내리다 그치지 않고 아침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줄기차게 내렸다. 땅을 흠뻑 적신 진짜 비가 내린 것이다. 봄 가뭄에 애 태우던 농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모처럼 내리는 단비를 기꺼이 맞으며 그들은 밭둑을 다졌고 물꼬를 손질했다.

24절기 중 봄의 마지막 절기가 지나감으로써 봄은 이제 절정에 이르렀다. 곡식을 싹 틔울 비도 충분히 내렸고 나무들은 대지 속 뿌리에서 힘차게 생명수를 빨아들여 제대로 물이 오를 것이다.
거칠게 쏟아지는 비바람 속에서도 산이며 들이며 자연의 변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마지막 힘을 뻗대기는 찬 기운과 따스한 기운이 공존하는 가운데 자연은 날마다 옷을 갈아입어 먼산바라기가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다.

작년 이맘때에도 봄은 이랬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명체로서 느끼는 봄은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 생각의 변화도 있겠거니와 자연은 절대로 시계추처럼 똑같은 구간을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마다 새순이 돋는 시기도, 꽃이 피는 시기도, 봄비의 양도 항상 다르다. 계절의 순환이라는 일정한 틀이 지속되는 가운데 자연은 꾸준히 변화하여 하루하루 순간순간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 그들의 이치다. 이 모든 변화는 과연 어디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삶은 또한 무엇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곡우 다음날 이른 아침, K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K는 회사를 다니던 시절 알게 된 친구. 둘 다 뜻도 맞고 관심사항도 비슷해서 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친하게 지내왔다. 그는 내가 원하면 언제든 자신의 노동력을 백퍼센트 공급해줄 수 있는 고마운 친구이기도 하다.

K는 밤새워 술을 마셨는지 꽤 취해 있었다. 전화기 속에서 술내음이 진동하는 듯했다. 그는 회사에서 잘렸다고 말했다. 회사를 옮긴 지 열흘 만에 그 회사의 사장으로부터 그만두라는 통고를 받았다고 했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어디 있냐고 K는 울분을 털어 놓았다.

어느 보석가공업체의 홍보마케팅 담당자로 일하게 된 K에게 사장은 입사 당일부터 실적을 요구하며 꾸준하게 압력을 가했다. 회사 현황과 업무 파악도 못한 K에게 언론사에 홍보는 왜 안 되고 있으며 회사 홍보소개서는 왜 아직도 제작이 안 되고 있는지를 다그쳤다. 인내력이 고갈된 K가 마침내 ‘왜 이리 급한가, 일이라는 것이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한마디 하자 ‘당신처럼 부정적인 사람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며 회사에서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아무리 일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경시하기로서니 경영주의 횡포가 이정도일 줄까지는 몰랐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못된 사람들이 불경기 바람을 타고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근로자를 제 집에서 부리는 종이나 기계 부품정도로만 생각하는 그들의 횡포 속에서 소중한 인격들이 처참하게 손상되고 있다.

전화기 건너편의 K는 나를 부러워했다. 귀농을 한다고 했을 때 먹고사는 것이 걱정되지도 않느냐며 한사코 말렸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이제는 시골로 내려올 때가 된 것 아니냐는 내 말에 그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다. 사회복지시설을 시골에 짓고 장애우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하는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밑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직은 도시에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의 삶이 녹록치 않겠지만 그가 아직 아름다운 꿈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시인 도종환은 ‘나뭇잎의 꿈’이라는 시에서 ‘나뭇잎은 사월에도 청명과 곡우 사이에 돋는 잎이 가장 맑다’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면 꼭 사월 나뭇잎처럼 한순간에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었으면 싶다‘고 노래했다.

시인이 노래한 사월의 나뭇잎은 정말 맑고 푸르다. 곡우를 흠뻑 맞은 어린 묘목의 잎사귀들이 반짝반짝 윤이 나고 푸르른 기세가 등등하다. 거친 돌풍에 혹여 뿌리째 뽑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이들은 꾸준히 자랄 것이다. 끊임없이 양분과 수분을 섭취해 제 몸을 살찌어가며 성장을 거듭할 것이다.

사월 나뭇잎처럼 한순간에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희망은 있다. 우리에겐 아직 더불어 살려는 아름다운 꿈이 있으며 어떤 악조건에도 성장을 멈추지 않을 나무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 철 (ychul20@gmail.com)

1968년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기업 홍보팀에서 일하다 자연과의 공생과 노동을 통한 삶의 균형을 찾고자 2007년 충북 영동으로 귀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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