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매일반’이라 했던가. 청명·한식이 6년에 한번 꼴로 돌아온다는 같은 날에 겹쳐 지났다. 만물이 맑고 밝아진다는 청명이 지나니 대지는 푸르고 맑게 다시 태어난 듯하다.
어슴푸레하게 어둠이 걷히고 있는 어느 새벽, 뫼밭에 쑥 향기가 진동한다. 선조들은 청초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일컬어 ‘쑥향 나는 낭자’라 했다. 비록 낭자는 없을지언정 쌉싸하고 은은한 쑥향이 새벽 공기를 타고 몸속을 가볍게 흥분시킨다.

쑥 효소를 담그기 위해 밭 이곳저곳을 훑어가며 어린 쑥을 칼로 도려 소쿠리에 담기 시작했다. 쑥 효소는 물에 희석해 여름 내내 갈증을 풀어주는 훌륭한 음용수 역할을 할 것이며, 탁월한 생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쑥인 만큼 포도나무와 블루베리의 영양제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지난해에 이웃 아저씨가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자네는 쑥도 재배하나 보지.” 밭 여기저기에서 ‘쑥쑥’ 무더기로 올라오던 쑥들을 보시며 농담 삼아 하신 말씀이었다.

몇 년 동안 관리도 잘 안되고 묵었던 밭이라 처음 이곳을 얻었을 당시엔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밭을 모조리 점령한 쑥 뭉치들은 괭이로 캐내려 해도 뿌리가 워낙 질기고 질겨 처음 농사를 시작한 나를 몹시 힘들게 했다. 혹독한 추위에도 잎사귀 하나 떨어지지 않는 것이 쑥이라는데 오죽했겠는가. 녀석들이 정말 야속하고 미웠다. 그러는 나를 지들끼리 ‘쑥덕쑥덕’ 흉보고 깔깔대는 것 같기도 했고.
이웃들은 쑥 뿌리 말라 죽이는 데는 근사미가 최고라며 뛰어난 효능의 제초제를 강권하기도 했다. 이를 물리치고 몇 번에 걸쳐 경운기로 밭을 가는 것으로 대신했다. 덕분에 올해에도 적잖은 쑥들이 곳곳에서 잘 자라고 있다. 지난여름 떨어진 자신들의 잎과 줄기와 뿌리를 밑거름으로 딛고 다시 땅위에 올라서고 있는 것이다.

쑥 하나를 뿌리까지 캐내어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린 솜털이 빽빽하게 달린 어린잎들이 서너 개의 대공을 타고 타원형을 그리며 위로 솟구치고 있다. 허연 뿌리가 가느다란 실뿌리들을 앞세운 채 토양을 맛보아 가며 끊임없이 땅 속으로 파고들고 옆으로 뻗어간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왕성한 번식력을 앞세워 위로 아래로 옆으로, 3차원의 방향으로 동시에 성장하는 것이 이 친구의 생리다.

쑥은 어느 장소든 터를 잡기만 하면 자신의 몸을 지상과 지하로 부풀리고, 진지를 확장하여 군생을 시작한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자기의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다른 식물의 침입을 막는다. 다른 작물이나 풀의 뿌리가 제대로 뻗지 못하게 감아내는가 하면 독특한 향기를 몸에서 내뿜어 침입자를 경계하고 주변에 대한 강력한 정화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도 일찍이 그와 같은 쑥의 정화능력을 인정해 단오날에는 부정을 씻어내기 위해 쑥을 사립문에 걸어놓았고, 서양에서도 쑥의 도안과 칼의 도안을 겹쳐놓고 마귀와 병을 쫓아내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 역시 작년부터 쑥을 말려 집안 곳곳에 걸어 놓곤 했다.

쑥을 두고 자연이 인간에게 베푼 가장 값진 선물의 하나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만큼 쑥의 약효와 영양분이 탁월하다는 이야기겠다. 혈관을 튼튼하게 만드는 기능, 죽은 피나 어혈을 분해해서 몸 밖으로 빼내는 작용, 피를 만들어내고 혈액이 온 몸으로 순조롭게 흐르게 도와주는 기능 등 쑥은 인간의 혈관계통에 신선한 생명력을 공급해 준다.

생명력이 강한 이런 친구를 지척에 두고 언제든 내가 필요로 할 때 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큰 기쁨이고 행복이다. 주변 환경과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나는 참 운이 좋은 편이다. 도시에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값진 체험이다.

수천, 수만 년 동안 자연적으로 형성된 땅과 기후조건에서 사람의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제 멋대로 자란 나물들이 이렇게 대지와 인간의 핏줄을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 그 질긴 생명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땅은 벌거숭이가 되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이들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될 자격이 있을 것이다.

외부의 공격과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 서로의 뿌리를 칭칭 감아대며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야생의 원초적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숱한 이해관계와 사회적 조건에 길들여지고 나약해진 인간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허위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감추어진 본성을 드러낼 것을 쑥은 자극하고 종용하고 있다.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에 경의를 표한다.



김 철 (ychul20@gmail.com)
1968년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기업 홍보팀에서 일하다 자연과의 공생과 노동을 통한 삶의 균형을 찾고자 2007년 충북 영동으로 귀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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