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네 가묘(假墓)를 쓰던 날은 다행히 날이 좋았다. 수도권과 인근 도시에 흩어져 살던 자식 손주들이 이른 아침에 고향집으로 서둘러 내려왔다. 날씨도 좋은데다 온가족이 빠짐없이 모여들자 어제까지만 해도 낯이 어두웠던 아저씨, 아주머니의 얼굴이 한결 밝아지셨다.

묏자리는 부부가 수십 년 넘게 살아온 집을 동쪽에서 마주하는 언덕배기에 자리 잡았다. 가묘를 만들어 두는 것을 아저씨는 묘 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저씨는 며칠 전부터 손수 진입로의 잡목들을 낫으로 베고, 드나들기 편하게 길가에 돌멩이를 받혀 길을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묏자리 주변에 회양목과 영산홍을 심으셨다.

아저씨가 그렇게 일하시는 것을 아주머니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셨다. 내가 옆에 와 있는 것을 보시더니 “아유, 지겨워라. 살아서 그리 고생하며 오래 산 것도 지겨운데 늙어서도 같이 묻히게 됐네.”
말씀은 웃으며 하셨지만 눈가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래도 저 양반이 남들처럼 마누라한테 주먹질 한번 한 적 없는 사람이여. 입으로야 하루 멀다하고 다툰 적도 많았지. 네가 나가니, 내가 나가니 하며 보따리를 쌌다 풀었다 한 적도 많았고. 그랬는디 벌써 죽을 때가 얼마 안 남았다고, 저케 같이 묻힐 땅을 손보고 있으니…. 세월도 참….”

묘에 묻힐 당사자의 입장에서 직접 묏자리를 손보고 길을 다지는 아저씨의 표정도 쓸쓸하긴 마찬가지이셨다. 올해 연세 75세. 이미 5년 전쯤 위암수술을 받으시면서 한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으셨지만 그럭저럭 버티시며 아직까지는 포도농사를 직접 지어 오셨다.

하지만 작년부터는 기력이 예전에 비해 크게 쇠하고 있는 것을 아저씨는 알고 계셨다. 젊었을 적 도로공사니, 저수지 공사 등에 품을 팔러 다니셨던 때를 빼놓고서는 이골 나게 농사일에 파묻혀 살아오신 인생이다.
남들처럼 대학까지 가르치진 못했어도 자식들이 저마다 자기 일을 찾아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에 아저씨도 마음이 놓이신 듯하다.

가묘를 쓰던 날, 봉분은 실제 묘와 꼭 같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봉분 안에는 사기접시를 두 개 덮어두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묘 표한다는 것이 비로소 그 의미가 완성된 것이다.

부모가 묻힐 가묘를 바라보는 5남매 자식들의 모습이 숙연하다. 바야흐로 부모가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았음을 그들은 실감한다. 국민들의 과반수가 화장을 선호하는 요즘의 추세에서 어쩌면 가묘는 한물간 매장행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저씨의 가족만큼은 가묘를 통해 큰 것을 얻었을 것이다. 갈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돌아보고 마감할 수 있는 정리의 기회가 되었고, 남은 자들은 부모들이 가고 난 후 그들이 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는 기회가 되었으니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죽음과 삶은 핏줄을 타고 그렇게 이어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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