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하고 적막하다. 간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점심때가 지난 지금도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가히 온 세상을 집어 삼킬 듯 거침이 없다.
차 한 잔을 진하게 우려내어 폭설과 마주한다. 쏟아 붓는 듯한 눈의 세력에 비하면 인간세계는 얼마나 나약한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을. 생사의 멍에를 괜히 짊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해마다 3월이 되어 사람들이 봄이 왔다고 들뜰 무렵 하늘은 그 가벼운 마음을 조롱하듯 이렇게 폭설을 퍼붓거나 엄동설한의 강추위를 내려주곤 했다. 몇 년 전쯤이던가, 폭설로 고속도로가 마비되었던 일도 있었고, 작년에는 갑작스레 불어 닥친 강추위로 이곳 영동의 포도농가들도 꽤 큰 동해 피해를 입기도 했었다.

일말의 틈도 없이 오로지 있는 그대로 행할 뿐인 자연의 법칙. 인간 중심으로 보면 야속하기도 하겠지만 만물을 관장하는 자연의 법칙은 예외도 없을뿐더러 때로는 무자비하기도 하다. 그래서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행하는 것이야말로 뭇 인간들이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고 경외해야 마땅한 것인지도 모른다.

폭설의 영향일까. 겨울은 끝나고 봄은 왔지만 분위기는 음산하고 각박하다. 물론 그 분위기란 인사(人事)를 일컫는다. 새들은 자유롭고, 냉이며 쑥이며 고들빼기며 갖가지 봄나물들이 지천에서 너도 나도 고개를 쏙쏙 내밀고 있건만 세인들의 마음은 편안하지 못하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우리나라도 당면한 경제위기의 파고가 예상보다 클 거라며 이제 서서히 그 잔인한 영향력을 사람들이 현실에서 체감할 때가 도래했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것이 사실일지 아닐지는 얼마 후면 드러나겠지만, 어쨌든 전세계가 부닥친 경제상황이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누군가 이야기했듯 우리 경제가 위기 아닌 때가 있었냐마는 이번 일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천문학적인 구제금융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미국하며, 연쇄 국가부도 상태에 빠진 동유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까지 위태로운 실정이니 실상 전세계가 깊은 수렁 속에 빠진 꼴이 됐다.



인간의 끊임없는 물질적 욕망, 그리고 그것과 교감하며 끊임없는 상승작용을 일으켜온 자본주의의 발전 사이에 뭔가 치명적인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초첨단 자본주의 금융공학시스템을 갖춰놓았다는 뉴욕의 월가가 이번 위기의 진원지라는 것이 그 표면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한정된 자본으로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자본을 유동화시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나의 담보로도 수많은 파생상품을 만들어 냈으니, 초첨단 금융공학의 실체는 바로 다단계구조에 다름 아니었다. 그 피라미드 구조에서 토대에 구멍 하나 뚫리자 어쩔 도리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지 금융시스템을 재설계하는 것으로 이번 위기가 마무리될 것 같지는 않다.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 모두의 통절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인지 근원적인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이번 일을 밑거름으로 삶의 질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 욕망에만 기대어 살아가는 절름발이 인생은 고달프고 황폐한 삶이다. 필요를 줄이면 소비가 줄어들고, 소비가 줄면 적은 돈으로도 넉넉한 생활이 가능해진다.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를 최소화하는 단순 소박한 삶을 일구는 길이 지금 경제위기의 유일한 탈출구가 아닐까?

물론 이것은 시골살이 초년병인 나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시골에 살면서도 도시에서 누리던 물질적 풍요에 집착한다면 이곳에 내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삶의 단순화를 통해 자연이 주는 풍요와 정신적 평안을 누려나가는 것은 매일매일 다짐하고 노력해야할 중대한 과제가 될 것이다.

사람도 나무와 같이, 풀잎과도 같이 제 몫을 먹고 과식을 안 하며 산다면 모두 더불어 살 수 있을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을 없애려 하고, 없어야 할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이상 인간의 삶은 갈수록 각박해진다. 그 무용지물들은 언제든 인간의 삶을 옥죄는 족쇄가 될 것이다. 오후 늦게야 눈은 그쳤다. 단상에서 벗어나 포도나무 전정하던 것을 마무리할 때다. 다행히, 서쪽하늘 어디선가 한줄기 강한 빛이 뫼밭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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