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절망이었던 그녀
‘하동딸기브랜드’ 일군 농촌여성으로


산죽나무 숲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산허리를 감싸고 도는 아침 안개가 지나는 이의 발목을 붙잡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운 동네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위치한 김옥해(36세·농업, 경남 하동군 횡천면 남산리)씨의 집에서 내려다 본 남산리의 정경은 한 폭의 수채화다. 산 속이라 그런지 손이 시릴 정도로 아침 공기가 차다. 바깥 정경과는 반대로 집안으로 들어서니 분주하기 짝이 없다. 부엌 겸 거실에 네 가족이 다 나와 있다. 찌개 불을 낮추고 김치를 썰어내는 김옥해씨, 걷어 붙인 소매에 수수한 옷차림이 여느 삼십대 중반의 농촌 아낙과 다를 바 없다.

밑천 없이 시작한 딸기농사
티끌모아 태산…13개동까지 늘어

중국 길림성 장춘 출신인 김옥해씨는 조선족 부모님에게서 태어났다. 2남 7녀, 형제가 모두 9남매로 대가족이다.
1991년 당시 대통령 공약 사업으로 추진된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사업대상자로 선발된 남편을 만나 머나먼 곳으로 시집왔다.
가난한 친정에 도움을 주고자 어린 나이에 별 고민 없이 선뜻 시집왔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친정에 도움 줄 상황이 아니었다.

“처음 시집 왔을 때는 너무 서글펐어요. 장춘에는 산이 별로 없었는데 시골 산길로 굽이굽이 차가 들어가는데 얼마나 서러웠던지. 부모님 생각도 나고 이런 골짜기에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에다 아침에 눈 떠 보니 산 속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아 울기도 많이 했지요. 그나마 산 속이어도 중국보다 춥지 않아 견디기가 수월한 게 좀 위로가 되었지요. 마음도 추운데 몸까지 추우면 더 힘들잖아요. 중국의 겨울은 영하 30도로 내려가는데 하동지방은 겨울에도 포근하니 사람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동네 같아요.”

김씨의 가족은 슬하에 1남 2녀와 남편, 시아주버니, 시어머니 이렇게 여섯 명이다. 그런데 한 집에서 다 같이 살지 못한다. 큰딸 화민이(중 2)는 집에서 20여 분 정도 떨어진 본가에서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하우스와 본가가 멀어 처음에는 아이들은 집에 두고 부부만 하우스에서 생활했다. 지금은 딸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 시어머니 수발을 들어 주고 있어서 하우스 근처로 아예 집을 빌려 이사를 했다. 혼자되신 시아주버니가 일을 거들어 주고 있어서 한결 수월하지만 그래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옛날에는 농한기가 있었다. 그러나 시설재배를 하고부터는 도무지 여유라고는 없다. 늘 시간에 쫓긴다.
“처녀 때 중국에서 시골로 시집 안 가려고 노력 많이 했어요. 저는 도시가 좋았거든요. 그래도 한국은 잘 사니까 좋을 줄 알고 왔는데 막상 오니까 더 힘들어예.”
한국은 농촌이라도 기계화가 되어 살기 좋다고 했다. 그런데 웬걸 일일이 다 손으로 일하고 그것도 매일매일 하는 게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중국에서는 기후 때문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데, 여긴 사계절 일만 해야 되니 죽을 지경이었어요. 또 그렇게 일하지 않고는 살기도 힘들고요.”
정착해서 살아보니 왜 중국이 한국보다 못 사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이 생겼다. 바로 근면성이다. 한국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부지런하고, 기후가 좋으니 사계절 일하는 게 가능하다. 그럼 자연적으로 수입이 늘어난다. 그러나 이내 불만이 터져 나온다.

“요새는 농산물 값이 너무 떨어져 일하는 만큼 돈이 안 모아져 살기 정말 힘들어요. 정부 정책이 좀 더 뒷받침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다들 농촌 싫다고 안 떠나갈 텐데…”
돌아보면 아득하다. 하동군의 대표적인 시설 딸기 농가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흘린 땀방울과 뱉은 한숨은 말로 다 못할 지경이다.

“처음엔 너무 힘들었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밑천 없이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서글픈데요. 아까 얘기했잖아요. 하우스에서도 살았다고.”
“친정 도와주러 낯설고 물설은 이곳까지 왔다고 했는데 도움은 좀 줬습니까?”
“친정요? 글쎄요, 도움이 되긴 했지예.”
친정 이야기가 나오니 활짝 웃는다.

“중국에 계시던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두 초청했지요. 부모님은 서울에서 살고 계시고 언니 둘과 오빠 둘은 한국에서 좀 살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어예.”
친정 식구들과 왕래를 자주 하고 싶지만 서울 한번 가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 다 그렇지 않겠느냐고. 늘어난 식구만큼 하우스도 늘었다.

부지런히 일한 결과였다. 신혼 초에 6개의 하우스로 시작해 수박농사, 고추농사, 벼농사, 안 해본 게 없었는데 별 재미를 못 봤단다. 딸기농사는 6년 전부터 시작했는데 지금은 하우스가 13개 동으로 늘어났다. 물론 하우스의 수준도 옛날보다는 상당히 업그레이드되었고, 연간 소득이 7천만 원 정도로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듯하다. 농촌 여성 결혼이민자로서 김씨는 성공적인 정착을 했다고 보여진다.

<농림부 여성정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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