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 쌀산업 성적표를 들여다보자. 농민들은 정부가 이끄는 대로 열심히 일해 단위면적 수확량을 많이 늘렸다. 90년만에 찾아왔다는 극심한 가뭄을 이기고 벼 풍작을 일궜기에 더 값지다. 농민들은 밤잠을 설치며 논에 물을 댔으며 천신만고 끝에 나라 백성들의 먹을거리를 만들어냈다. 칭찬을 들을 만도 하다. 이대로 점수를 매기면 900년만에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성적 평가기준이 바뀌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농산물 시장개방’을 새 성적표로 내밀었고 정부는 ‘국제 경쟁력’을 잣대 삼았다. 정부가 내민 잣대는 다수확이 아닌 고품질 쌀이었으며 눈금은 자주 80㎏ 한 가마에 3만원인 중국 쌀을 가리켰다. 이에 따라 우리 농업은 삽시간에 경쟁력 없는 산업이 됐으며, 쌀은 있으면 좋고 없을 때 다른 나라에서 들여오면 되는 공산품쯤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지난해 우리 쌀산업은 된서리를 맞았고 농민들은 땀흘려 일한 보람도 없이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 쌀 비중 여전히 커

쌀값 하락과 함께 WTO 뉴라운드 출범, 중국의 WTO 가입 소식은 우리나라 쌀 재배농가들 처지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농민들은 2004년 WTO 쌀 재협상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농민들은 쌀 재협상에서 ‘관세화 유예’가 이뤄지길 바라지만 협상에 임하는 정부 태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 불안해한다.

앞으로 쌀농사에서마저 안정된 소득을 얻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 때문에 일부 농민들은 쌀농사를 그만두고 다른 작물을 선택하거나 아예 농업에서 손을 떼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지만 쌀산업이 농업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여전히 크다.

농림부 통계에 따르면 쌀농사 소득은 2000년에 농업소득의 52%, 농가소득의 24%를 차지했다. 더구나 농업소득과 쌀 소득을 따로 보면, 1995년에 견줘 2000년 농업소득은 4% 늘었으나 쌀 소득은 42.3%나 늘어났다. 그 동안 다른 작물보다 쌀이 농가의 중요한 소득작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국민총생산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5년 4.5%에서 2000년 2.0%로 줄었으며 쌀 구입비가 도시소비자 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85년 8.9%에서 2000년 2.1%로 크게 줄었다.


◇ 쌀 관세화 꼭 막아야

쌀산업을 계속 뒤흔드는 것은 2004년 재협상 때 닥쳐올지 모를 쌀 관세화 태풍이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문 해석을 두고 전문가들조차 최근까지 이견을 보였다. 쌀 재협상 기간이 2004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년이며 이 협상 결과를 적용하는 시점은 2005년 1월 1일이다.

이 협상기간에 협상을 마무리하지 못했을 때 닥쳐올 상황을 두고 협정문 풀이가 달랐다는 얘기다. 일부 전문가들은 관세화든 유예든 2004년에 협상을 매듭짓지 않으면 자동으로 관세화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전문가들은 협상이 실패할 때 반드시 관세화해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이정환 부원장은 “협상기간에 마무리하지 못하면 농산물수출국들 중심으로 우리나라를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할 것이 뻔하다”고 지적한 뒤 “제소에 따라 패널이 구성되고, 이 패널 판정이 쌀 관세화보다 더 불리한 조건을 내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모든 협상 가능성을 따져 준비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관세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협상이 관세화로 마무리되거나 WTO 패널 판정까지 가는 상황에 대해서도 세밀히 준비해야 한다는 태도다.

농협중앙회 조사기획팀 여영현 차장은 “빗장을 한 번 열면 다시 걸어 닫을 수 없다”며 “관세화를 뒤로 미루는 것이 쌀 자급률을 유지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고 말했다.

농경연 농업전망이나 고려대 한두봉 교수, 경북대 김충실 교수가 내놓은 연구결과에 따르면 관세화를 유예하고 최소시장접근(MMA) 물량을 8%까지 늘리더라도 쌀 자급률을 90%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지만 관세화할 때는 쌀 자급률이 76%까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 중장기대책 올 3월 확정

정부는 적정량의 쌀 생산을 위해 논에 다른 작물을 심거나 놀릴 경우 보상비를 지급하는 생산조정제도를 도입해 올해 시범 실시하거나 벼 수매규격을 4등급으로 세분하는 등 쌀산업 중장기대책을 올 3월에 확정해 시행할 것으로 보인다.

농림부는 지난 12월 26일 쌀산업안정대책자문위원회를 열고 정부가 주도해온 양곡정책의 기본 틀을 시장원리에 맡기는 제도로 바꾸기 위해 이 같은 내용을 뼈대로 한 ‘2002년도 쌀산업과 중장기 쌀산업대책 검토방향’을 보고했다.

농림부는 1월 중순부터 이 자문위원회를 통해 전문가 초청토론회, 지역별 토론회를 열어 각계 의견을 모은 뒤 올 3월말께 ‘쌀산업 중장기대책’을 확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책에 따르면 올해 농가 신청을 받아 천수답 같은 한계농지를 포함해 일반농지에 콩나물콩과 사료작물로 쓸 옥수수를 재배할 경우 쌀 재배로 얻을 수 있는 소득과 차이가 있으면 이 차액만큼을 농수산물가격안정기금과 축산발전기금에서 지원해준다.

농림부는 현행 약정수매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쌀의 적정한 비축목표량을 정하고, 시가로 쌀을 수매해 비축했다가 시가로 방출하는 공공비축제도 도입을 검토하기로 했다.

아울러 농림부는 벼 수매규격을 현행 3등급에 특등품을 신설해 4등급으로 세분하고 현재 96% 수준인 1등품 비율을 줄이는 한편 품질에 따라 수매등급을 나눠 특등품에 대해서는 1등품보다 2천원(조곡 40㎏)을 더 주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이날 안종운 농림부 차관보는 생산조정제도 도입과 관련해 “전작보상 예산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2002년도에는 약 5천ha 정도 논에 대해 농안기금과 축발기금을 재원으로 활용해 전작보상을 시범 실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 “농가소득 보장책 빠졌다”

농민단체들은 정부 쌀산업 중장기대책 방향과 올해 고품질쌀 생산대책이 쌀산업을 지키는 데 실효를 거둘지 알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한편 농가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이 빠졌다고 지적했다.

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 장세일 사무총장은 “고품질쌀 재배면적을 늘리고 공공비축제도를 도입한다는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과연 전작보상제도가 수급조정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며 “휴경보상이든 전작보상이든 식량안보에 필요한 농지는 꼭 확보할 수 있도록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장 정광훈)은 쌀 생산비 자체조사를 바탕으로 농가소득을 추산한 결과, 지난해 쌀값 하락에 따른 쌀재배농가 소득 감소액이 약 1조5백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전체 논농업직접지불금 2천억원과 올해 예정한 4천억원을 합해도 소득보전에는 어림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더구나 정부 쌀산업 대책에는 앞으로 예상되는 쌀재배농가의 소득 감소분을 보전하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농업축소 현상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농 이호중 정책부장은 “정부 대책은 농가소득 보전책이 빠진 데다가 정확한 자료분석을 근거로 한 예측이나 대책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고 “기상재해나 통일 같은 여러 변수, 이에 따른 적정재고량, 수급전망, 재배면적을 자세히 분석해 대책을 내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농비 모자라 막노동 나갈판”

1만2천평 쌀재배 농민 徐씨의 소득계산법

전북 부안군 백산면 서모씨는 2001년 10월 20일 전후 1만2천평 너른 들녘에서 잘 여문 쌀을 거뒀다. 서씨가 벼를 심은 논은 대개 1필지가 6마지기(1천2백평)인 이 지역 계산법에 따르면 10필지, 서양단위로는 4ha 넓이다. 이 정도면 쌀 전업농가 전체 평균에 가깝지만 부안 백산지역 농민들의 농사규모에 견주면 적은 편이다. 20필지, 40필지 농사짓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이 넓은 땅을 실제 농사짓는 사람들이 다 소유하는 경우는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다.

서씨도 10필지 가운데 자기 땅은 1필지밖에(?) 안 된다. 이쯤에서 서씨의 2001년 쌀 소득을 단순 계산해보자.

먼저 이 지역 쌀 생산량과 도지(논 임대비)를 밝히자. 이곳은 1마지기에서 정곡 80㎏ 4가마에서 4가마 반을 먹는다(!). 이 가운데 도지는 4가마 기준으로 절반, 2가마를 준다. 필지(6마지기) 단위로 12가마를 주는데 땅을 얻으려 다투게 되면 1필지에 13가마를 선재(先도지)로 주기도 한다.

또 생산비는 마지기당 1가마를 잡는다. 어림잡아 남의 땅 빌려 쌀농사하면 1마지기에 1가마나 1가마 반 정도를 경작농민이 먹는 것이다.

풍년답게 서씨는 60마지기 논에서 정곡 2백70가마를 먹었다. 60마지기 생산비 60가마와 빌린 땅 9필지(54마지기) 도지 1백8가마를 빼면 1백2가마 남는데 이를 2000년과 같이 가마당 16만원으로 치면 1천6백32만원 소득을 올리는 셈. 하지만 쌀값이 떨어졌다. 서씨는 12월말에 가까운 정미소에 14만1천원에 내다 팔 수밖에 없었다. 정부 약정수매량은 물량이 몇 가마 되지 않아 소득에 별 차이가 없다. 1백2가마를 따져보니 1천4백38만원 정도.

자기 땅 1천2백평을 포함해 1만2천평 논에 쌀농사를 지었는데 소득이 1천4백여만원. 그러나 빠진 게 있다. 서씨는 관행대로 도지를 농사짓기 전에 땅 주인에게 줬으며 당시 쌀값 16만원을 쳐서 줬다. 그러니까 1백8가마에 대해 도지 차액 1만9천원씩 더 빼야, 단순하지만 소득이 정확히 나온다. 결국 1천4백38만2천원에서 2백5만2천원을 빼니 서씨의 1년 쌀농사 소득은 1천2백33만원.

허탈하다. 전국평균 가계소비 지출에 빠듯하다. 어찌해보면 종자는 구할 수 있을 테지만 농사지을 땅 도지를 먼저 줘야 하는데 막막하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지금 도지를 1가마당 14만1천원에 계산해 줬는데 연말에 12만원대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 죽으라는 얘기다. 서씨는 영농비라도 마련하기 위해 한겨울, 막노동판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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