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양곡관리법'을 제정한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양곡정책은 정부통제와 자유시장 논리가 상호작용하며 여러 굽이를 돌아왔다.

경제발전과 인플레 억제를 위해 1960년대까지 정부의 '저곡가 저임금' 정책이 유지됐으며 농가소득보전 명목으로 1969년 하곡부터 실시한 '이중곡가제'는 양곡관리기금 결손 발생과 양곡특별재정 적자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1986년부터 진행된 우루과이라운드(UR) 농산물협정이 1993년 말에 타결되고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함으로써 우리나라 농업은 개방파고에 휩쓸렸다.

우리 농업의 반석이자 마지막 보루인 쌀의 경우 농업인들의 힘으로 시장개방과 관세화를 10년 뒤로 미뤘다. 당시 발등에 떨어진 불은 가까스로 껐지만 어느새 2004년 '쌀 관세화 유예' 관련 재협상이 코앞에 닥쳤다.

#2004년 쌀 재협상 '어떻게'

세계무역기구 출범 이후 7, 8년의 '유예기간' 동안 우리 농업, 특히 쌀산업은 어디로 향했는가? 정부는 "세계무역기구 농산물협정에 따른 농업보조금 감축으로 정부양곡의 수매량 감축은 피할 수 없는 조치"라고 설명하며 쌀 유통의 자유시장기능을 적극 살리는 양곡정책을 방향타로 잡았다.

그러나 쌀의 민간 재고량이 적정수준을 넘어 심각한 사회경제문제로 대두하자 정부는 혼비백산하며 방향타를 슬그머니 놓았다. 숨을 고르고 쌀 산업기반을 다지도록 어렵사리 시간을 얻었는데 정부는 그간에 이렇다할 양정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2004년 쌀 '재협상'을 '개방조약'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에 대해 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 김순동 사무총장은 "현재 재고미 문제보다 심각한 것은 정부가 쌀산업 축소 기조로 일관하며 쌀값 하락을 유도하는 데 있다"며 "쌀산업을 최소한 현 수준으로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정부의 재고미 대책이나 쌀 종합대책이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소득보전, 쌀산업 지키기 양정 필요

통계는 허깨비 노름인지도 모른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이호중 정책부장은 "과연 쌀 재고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것인지, 허깨비 장단에 놀아난 것은 아닌지 되짚어봐야 한다"고 말하고 "결국 쌀 시장개방과 국제경쟁력을 빌미로 정부가 쌀값 하락에 따른 피해를 농가에 떠넘기고 책임을 면하려는 것이 아니냐"며 강한 의구심을 토한다.

아울러 일부 농업인들은 "세계식량농업기구(FAO)가 적정재고 기준으로 제시한 '양곡소비량의 16∼17%'를 절대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거나 "우리 쌀의 특수한 지위와 함께 식량안보, 분단상황 등을 고려해 통일을 대비한 양곡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도 최근 쌀산업의 위기가 재고미 누증에서 비롯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쌀 소비가 줄고 산지 쌀값이 계속 떨어지는 현상을 달리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쌀산업 위기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책임소재를 떠나 위기 극복을 위해 어떤 대책이 필요한가'라는 점이다.

추상적이지만 해답은 간단하다. 우리나라 양곡정책이 식량확보와 원활한 수급체계, 농가소득보장과 쌀산업기반 유지에 있다고 할 때 정부의 양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함이 위기의 본질이며 양정이 제자리를 찾는 일이 바로 극복책이다.

#알맹이 없는 정부종합대책

눈뜨고 코 베이듯 정부는 쌀 재고문제를 알면서도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농림부 식량정책 담당자는 최근 양정 추진방향을 설명하면서 양보다는 미질에 중점을 둔 쌀 생산 및 유통정책 추진, 영농규모화 등 구조개선정책 지속 실시, 논농업직불제를 통한 소득보전정책 강화, 미곡종합처리장(RPC) 비중과 기능 확대, 쌀 소비촉진대책 지속 추진 등을 내세웠다.

윤석원 중앙대 교수는 수급 불균형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점, 농협 및 민간 미곡종합처리장이 큰 어려움을 당하는 점, 수확기 쌀값 폭락으로 농가소득 감소가 우려된다는 점 등을 들어 "쌀산업이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하고 몇 가지 위기 해소책을 제시했다.

윤 교수가 제시한 해소책은 ▲정부의 공매계획 취소(공표) ▲2001년산 수매곡의 시장격리 ▲매년 일정량을 북한에 지원하는 제도 마련 ▲정부지원 확대를 통한 미곡종합처리장 운영 정상화 ▲양질미 정책전환을 뒷받침하는 세부정책 수립 ▲브랜드쌀 개발과 계약재배 확대 ▲쌀 소비촉진을 위한 홍보 강화와 쌀 음식 개발 ▲고품질 쌀의 수출 등이다.

한편 정부는 내년부터 추곡수매가를 동결하고 쌀 재고를 적정수준으로 줄이기 위해 증산정책을 포기하는 등의 종합대책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림부에 따르면 매년 추곡수매가를 2∼4% 인상했으며 이 때문에 국제가격과의 격차가 더 벌어져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는 점을 감안, 정부는 내년부터 추곡수매가를 동결하는 쪽으로 양곡정책을 추진한다.

아울러 한갑수 농림부장관은 지난 24일 청와대에서 △추곡수매가 동결 △민간부문 수매량 확대 △수탁판매제도 도입 △학교급식용 양질미 공급 및 소비촉진책 마련 등을 골자로 한 '쌀산업 종합발전대책'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정부의 공식발표가 임박하고 그 내용이 윤곽을 드러내자 농업인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농업인단체들이 일찌감치 반대해온 수탁판매제도 도입을 버젓이 이번 대책에 끼워 넣은 반면 지금의 쌀값 하락을 막을만한 장치는 물론 농가소득보전과 쌀산업 유지를 위한 중장기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전농은 27일 성명을 통해 "쌀산업 종합발전대책이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 책임을 민간에게 전가하는 한편 양정실패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농업인에게만 떠넘기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 대책을 철회하고 농가소득보전과 식량자급이라는 목표 하에 재수립하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수확기 산지가격으로 매입해 선도금 일부를 지불하는 수탁판매제도에 대해 "정부가 미곡처리장 운영적자만 해소하고 쌀값 폭락에 따른 피해를 농업인에게 전가하려는 것"이라며 도입을 반대했다.

#재고처리, 차액보전 등 법제화

양곡정책 궁극의 목표는 식량의 안정한 수급이라 할 수 있다. 천재지변이나 풍·흉에 끄떡없이 늘 국민이 굶지 않도록 하며 이듬해, 그 이태 후에도 식량을 생산하고 공급할 수 있도록 식량산업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생산을 조절하는 일부터 공급하는 일, 모자라면 채우고 남으면 처리하는 일까지 제대로 수행하면 된다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일본은 1994년 이후 연속 풍작으로 이월재고량이 크게 증가하고 쌀값이 계속 떨어지자 쌀 재배농가의 소득안정을 위해 몇 가지 양정대책을 세웠다.

일본 정부는 신미정책(1997) 논농업활성화대책(1999) 긴급종합쌀대책(2000)을 잇따라 수립해 재고처리, 생산조정, 도작경영안정대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 대책들은
△이월된 기존의 재고미를 식량원조, 가공용, 사료용 등으로 처분, 감축하고 신곡의 경우 과잉 생산분을 정부가 추가 매입하는 방식으로 시장가격을 지지하며(재고처리대책)
△쌀 생산조정을 강화해 재고누증을 방지하고 생산조정 논에 다른 작물을 재배할 경우 쌀소득 수준이 되도록 지원하고(생산조정대책)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쌀의 시장가격이 하락할 경우에 그 차액을 보전해 농가소득의 급격한 하락을 방지한다(도작경영안정대책)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양정을 살펴보면, 표면적으로 자유시장을 지향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개입해 생산을 조절하거나 재고미를 처리하는 한편 과잉재고에 따른 쌀값 하락 추세를 방치하지 않고 쌀값과 농가소득 지지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등 '계획적 식량수급 및 유통'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막대한 재정부담을 감수하면서 쌀값 및 농가소득보전 정책을 추진하는 데 대해 전업농중앙연합회 이해천 사무총장은 "국민의 주식인 쌀은 계획적이고 안정적인 수급과 유통이 필요하며 이를 실현하는 데 정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바탕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현재의 쌀 재고문제뿐만 아니라 향후 구조적 공급과잉 시기를 대비한 양정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농업인단체들은 식량수급이 균형을 이루도록 정부가 쌀 생산조정제도와 재고처리대책, 소비촉진책 등을 도입하는 한편 일본의 도작경영안정대책이나 미국의 차액보상제도와 같은 정책을 이번 쌀산업 종합발전대책에 포함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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