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많은데 밥은 적다. 사람들의 식생활 습관이 바뀌며 먹는 밥의 양이 줄고 있다. 밥이 되지 못해 상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는 쌀은 갈 데 없이 창고에서 묵는다. 시장에 내놔도 살 사람이, 생산을 해도 소비할 사람이 없다. 값이 떨어지는 문제는 둘째치고 이러다가 쌀을 재배할 사람이 없으면 사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보면 정부가 쌀 소비를 권장해야 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그러나 무턱대고 쌀을 소비하자, 밥을 먹자고 국민에게 '애국애농'을 호소할 수 없는 일이다.

농업인과 농업전문가들은 좋은 쌀을 생산하고 가공기술을 개선하는 한편 국민의 식생활 습관에 맞춰 손쉽게, 편하게 쌀을 소비할 수 있게 정책당국이 쌀 산업 전체를 돌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이러한 쌀 산업 재편사업이 본 궤도에 오를 때 쌀 소비 촉진과 식생활 개선을 위해 현재 농협이나 지방자치단체, 정부 여러 부처가 벌이는 '아침밥 먹기 운동'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쌀 소비량, '감소폭'이 문제

쌀 소비가 줄어드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민 1인의 연간 쌀 소비량은 1980년 132.4㎏, 1990년 119.6㎏, 2000년 93.6㎏으로 줄었다.

쌀 소비량이 줄어든다는 사실보다 그 감소폭이 점차 커지는 게 문제다. 1인당 쌀 소비량이 1990년까지 10년 새에 12.8㎏(9.7%) 줄었는데 지난 10년 동안에는 26㎏(21.7%)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농가와 도시가구(비농가)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을 따로 살펴보면, 농가는 1980년 150.7㎏에서 2000년 139.9㎏으로 약 10.8㎏이 줄었으며 도시가구는 125.5㎏에서 89.2㎏으로 36.3㎏이나 줄었다.

가까운 일본이나 대만과 비교하면 여전히 우리나라 1인당 쌀 소비량이 많지만 현재의 감소추세라면 머지않아 60∼70㎏ 수준으로 곤두박질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학자들은 "소득수준의 향상과 여가에 대한 효용이 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증가할수록 외식이 늘어난다"거나 "간편함을 선호하는 식생활 변화로 인해 쌀 소비가 줄 수밖에 없다"고 풀이하면서 앞으로 쌀 소비량은 계속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쌀 소비, 대안은 없나

일본 식량청은 지난해 국민 1인당 1개월간 쌀 소비량이 5천147g(연간 약 62㎏)으로서 1999년보다 5g(0.1%) 증가했으며 이는 1996년 집계 이후 처음으로 증가세를 보인 것이라고 최근 밝혔다.

아울러 식량청은 소비가 늘어난 요인에 대해 "도시락 등의 중식이나 쇠고기덮밥 등 외식에서의 쌀 소비량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의 쌀 소비형태와 생산, 유통, 가공 등이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와는 다르지만 최근 일본의 쌀 소비량 증가현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후 한국과 일본의 농업은 줄곧 서로 비교대상이 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간 쌀 소비량이 계속 줄다가 조금이나마 늘었다는 사실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지난 4월부터 쌀 포장, 표시와 관련해 '농림규격법'을 시행하고 있다. 일본 농림규격법은 쌀 품명(브랜드)을 표시할 때 쌀을 취급하는 등록업자뿐 아니라 직거래하는 농가까지 식량청의 검사를 받아야 하며 생산지, 생산연도, 품종 등을 반드시 표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본 자주유통미 전문가들은 이러한 농림규격 개정으로 '브랜드쌀'에 대한 소비자 평가는 확실히 달라지겠지만 외식이 크게 증가하는 식생활 변화 때문에 쌀 판매가 브랜드 인지도만으로 좌우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즉 소비자가 외식 및 가공업체들이 선택한 쌀을 '밥'으로 먹는 식생활 형태가 점차 늘면서 쌀 소비의 '열쇠'는 소비자나 생산자로부터 서서히 외식업자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일본에 500여 패밀리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한 업체의 쌀 소비량은 지난 10년 새에 4천t에서 5천t으로 늘었다. 이는 이 업체가 그만큼 쌀 소비확대를 이끌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 무균팩으로 포장한 밥이나 냉동밥 제품 등 가공품도 급성장하고 있다. 무균팩 밥의 생산량은 5년간 5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쌀 시장을 둘러싼 여러 환경이 일본과 다른 우리나라도 식생활의 간편화 추세로 가정에서 쌀 소비확대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외식업(단체급식, 패스트푸드, 음식점 등)의 발달로 '밥' 수요가 늘어날 개연성은 크다.

따라서 다양한 쌀 소비형태에 맞춰 생산, 가공, 유통체계를 재편하고 가정용과 사업용 등 용도별로 판매전략을 수립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쌀 대신 맛있는 밥을 달라"

정부는 해마다 지역별, 시·도별로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포함한 전국 쌀 생산량을 조사해 결과를 발표한다. 그 정확도가 의심받는 일은 접어두고 정부는 앞으로 '밥 생산량'을 조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농림부는 증산 위주의 미곡정책을 소비자 요구에 따른 안전성과 품질 중심의 쌀 산업정책으로 전환하겠다고 여러 번 밝혔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안정성과 품질향상에 그치지 않고 "쌀 대신 밥을 달라"고 요구한다.

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 운영자들은 물론 민간유통업자들이 기능성 쌀을 개발하고 고품질미를 생산하는 한편 브랜드 홍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누구에게 팔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판매전략이 부족하다.

일본 무세미(無洗米)와 유사한 '씻어나온 쌀'이 소비자의 손길을 끈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2년에 이미 시판한 무세미는 현재 일본 쌀 소비량의 6%(48만t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씻어나온 쌀' 또한 판매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들 쌀이 위생이나 품질 면에서 남다른 점이 있지만 소비자가 선호하는 까닭은 바로 씻을 필요가 없다는 점, 간편함 때문이다.

무세미 분야 전문가인 윤종락 한유무세미 대표는 "앞으로 무세미 시장은 급신장할 것"이라며 "쌀을 소비자 요구에 알맞게 혹은 용도별로 가공, 처리해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윤 대표는 "소비자들이 밥을 손쉽게 먹도록 만들어줘야 쌀 소비확대가 가능하다"고 말하고 "이를 위해 정부가 나서서 쌀 생산, 가공 및 판매체계를 쌀 시장의 새로운 환경에 걸맞게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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