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재고량이 적정수준을 넘어서면서 쌀값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연말에는 쌀 재고량이 1천100만 석을 넘을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양곡전문가들은 쌀값이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한다.

예견한 일이라는 일부의 시각과 미곡유통업자들의 위기의식이 정부에 지원방안을 촉구하는 행위로 나타났지만 누구보다 가슴앓이 심한 쪽은 바로 농업인들이다.

농가의 77%가 쌀을 재배하고 쌀 소득이 농업소득의 절반 남짓인 현실에서 쌀값 하락과 쌀 소득 감소는 농업인의 가슴을 짓누른다.

생산량이 줄지 않고 소비량은 해마다 줄어드는 현상이 쌀 수급의 불안정을 초래하는 제1원인이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쌀 산업의 한 축을 이루는 민간유통부문의 활성화에 있다는 지적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부의 수매물량이 해마다 줄고 이 부담을 민간유통부문이 짊어진다고 봤을 때 민간유통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특히 미곡유통의 핵인 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과 민간유통업체의 존망 여부는 우리나라 쌀 산업의 미래를 가름한다.

#미곡처리장…쌀 산업 주요기반

미곡종합처리장은 이제 쌀 산업을 지탱하는 기반이 됐다. 벼 생산비와 손실을 줄이고 양질의 쌀을 공급하기 위해 농업구조조정사업의 하나로 1991년부터 전국 쌀 생산지에 설치하기 시작한 미곡처리장이 나름대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농협의 미곡처리장은 199개소, 민간 미곡처리장은 131개소이며 건조저장시설은 농협이 285개소, 민간이 80여 개소를 운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협 조사부에 따르면 이 시설에서 지난해 정부수매량의 86%에 달하는 539만 석을 자체 매입했으며 미곡 손실방지까지 감안하면 미곡처리장 운영으로 인한 농가 수혜액이 1천367억 원에 이른다.

특히 국내보조금(AMS) 감축에 따라 정부수매량은 1994년 1천50만 석에서 지난해에 630여만 석으로 급감한 반면 농협 미곡처리장은 자체 매입량을 1995년 58만여 석에서 10배 가까이 늘려왔다.

양정전문가들은 이렇게 정부수매 감량분을 농협 미곡처리장이 매입함으로써 1994년 2조원에 이르던 정부의 양곡관리 결손이 지난해 6천억 원대까지 떨어진 것이라고 풀이했다.

#위기에 직면한 미곡처리장

농협RPC전국운영협의회 6월말 가결산 결과에 따르면 올해 농협 미곡처리장 199개소의 전체 적자규모가 지난해보다 2.7배 늘어난 320억 원이 될 전망이다. 추정대로라면 미곡처리장 1곳 평균 1억6천100만원의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에는 농협 미곡처리장 195개소 가운데 105개소가 적자를 냈으며 전체 적자총액은 118억 원이다. 농협 미곡처리장은 1996년 흑자 이후, 1999년을 제외하고 매년 적자를 기록했으며 적자규모도 커지고 있다.(표 참조)

농협중앙회 조사부 관계자는 "적자예상 미곡처리장 가운데 21곳은 4억 원 이상 경영손실을 볼 것으로 보여 타개책이 마땅찮다"며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경기도 이천과 강원도 철원 등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농협 미곡처리장은 대부분 경영손실을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며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했다.

민간 미곡유통업체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지난해까지 3년 새에 민간 미곡처리장 11곳이 부도를 냈으며 올해 들어 전남, 전북, 경남 지역에서 6업체가 도산한 것으로 확인됐다.

농협은 그나마 다른 사업을 통한 순익으로 미곡처리장 적자를 보전할 수 있는 처지지만 수익성이 그대로 존폐로 작용하는 민간 업체는 서로 연대보증으로 연명해온 것이 현실이다.

수익성이 떨어지고 도산하는 업체가 나타나자 이제는 연대보증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자칫 연쇄부도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한국양곡가공협회의 미곡처리장 관계자는 "민간 미곡처리장 대부분이 적자를 내는 등 잠재적 부실상태"라고 말하고 "문제의 심각성은 손실이 갈수록 커지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계절진폭 실종, '절름발이' 양정

쌀 소비량이 줄고 재고량이 크게 늘자 정부가 갖가지 대책을 내놓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다.

일부 농업인들은 쌀 소비가 줄어드는 것을 우려하면서도 정부가 대책이라며 내놓은 '쌀 소비촉진 캠페인'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대책인지를 꼬집어 말한다.

이와 관련해 농촌지도자회경기도연합회 관계자는 "쌀소비촉진법이든 어떤 형태든 제도를 통해 양곡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지적하고 "정부가 쌀 시장조절 기능을 상실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정부가 수매 등을 통해 민간재고를 관리할 수 있는 수단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농협중앙회 조사부 김두년 연구실장은 "과거 쌀 재고량이 1천400만 석에 달했던 때도 쌀값 하락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며 "그때는 재고량 대부분을 정부가 가지고 있었고 필요량만을 방출하는 식으로 시장을 관리하고 조절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곧 민간부문 재고량이 급증하는 현재의 쌀 시장 구조에 정부가 개입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특단의 대책을 내놔야만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특히 올해 들어 쌀값의 계절진폭이 1%에 넘나드는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쌀의 민간유통기능은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렀음을 감안하면 정부의 시장개입은 불가피하다.

전북 부안의 한 미곡유통업자는 "미곡유통사업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계절진폭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누구도 미곡유통시장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업계 한 목소리, "특단 대책"

쌀 재고량 누증문제가 일으킬 파장은 미곡처리장 경영손실에 그치지 않는다. 농업계가 한 목소리로 정부에 "특단의 대책"을 촉구하는 까닭은 현재의 쌀 재고문제가 결국 쌀 산업과 농업의 붕괴, 국가(식량)안보 불안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데 있다.

양곡유통위원회가 지난해 11월 대정부 건의를 통해 쌀 재고누적과 미곡처리장의 경영수지가 악화를 예상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촉구한 이래 농협과 민간 미곡유통업체, 농업인단체들은 일관하게 정부에 대책을 요구했다.

특히 미곡처리장을 운영하는 농협조합장 등 200여명은 지난 6월 '수확기 대책'을 협의하는 자리에서 "정부 수매량이 줄고 재고량이 급증해 농업인의 수매확대와 가격지지 요구가 더 거셀 전망"이라며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올해 수확기에 수매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농협RPC운영전국협의회는 쌀 재고 처리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촉구하는 대정부건의문을 채택한 바 있다. 이 협의회는 "단기적으로 정부 보유곡의 방출을 최대한 억제해 시장공급량이 더 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미곡처리장에 대한 경영지원규모 확대 △건조저장시설의 시설 및 보수 지원자금 확대 △현행 차액 산물수매제도의 개선 등을 요구했다.

이와 관련해 윤석원 중앙대 교수는 "농협과 민간의 미곡처리장이 최근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경영의 비효율성을 지적할 수도 있지만 쌀 수급 및 시장의 구조적 요인이 더 크다"고 지적하고 "정부가 지원을 확대하지 않으면 경영수지는 더 나빠지고 현재 수준의 물량마저 취급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농업인단체 관계자들은 "미곡처리장 지원에 대한 정부지출이 커지더라도 이를 감수하고 민간유통을 활성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단기적으로 재고미를 북한에 식량으로 지원하거나 국내시장과 격리하는 정책을 펴는 등 마비상태에 있는 미곡유통시장 기능을 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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