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진리를 탐구하며 흙을 벗삼아 흙과 함께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흙토자가 세 개 겹치는 11월 11일 11시는 전국의 농업인들이 한해 농사를 돌아보며 서로간 노고를 위로하며 우리 농업의 영원한 발전을 기약하는 날이자 시각이 되었다. 농업인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된지 다섯해를 맞이했지만 11월 11일이 어떻게 농업인의 날로 제정되었는지 유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농림부조차 이날의 제정경위를 일부 언론의 '농민의날'제정 캠페인과 농민단체의 대정부 건의 등에서 찾고 있을 정도다. 본지는 새천년 첫 농업인의 날을 맞아 오랜기간 농업계의 숙원이었던 '농업인의 날'이 생겨나게된 유래를 살펴보고 이날을 모든 농업인의 축제의 날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과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선배 농업인들을 찾아보았다. <편집자 주>

<사진1><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농업인의 날' 모태는 1964년 강원도 원성군농사개량구락부(현 원주시농촌지도자회)가 순수 민간차원에서 시작한 '농민의 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본지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1964년 당시 원성군농사개량구락부 원홍기회장과 김종학 총무를 비롯한 구락부 임원 20여명이 중심이 돼 '흙의 진리를 탐구하며 흙을 벗삼아 흙과 함께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농사절학을 이념으로 흙(土)자가 세 개 겹치는 11(土)월 11(土)일 11(土)시에 '농민의 날' 첫 행사를 치뤘다. 이 행사가 지금의 농업인의 날의 모태이며 농촌지도자원주시연합회는 이 행사를 계승 올해로 37회째를 맞고 있다.

1964년 당시 첫 '농민의 날 행사'는 원성군 문화회관에서 1,000여명의 농민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으며, 우수농업인 시상과 영화상영, 행운권 추첨 등을 곁들인 순수 농민의 축제가 되었다고 원홍기 회장은 전한다.

이 행사를 추진하는데 실무적 일을 도맡았던 김종학 총무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원성군수(서문택씨)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서군수는 많아야 1백명정도 모일 것이라 생각하고 "내가 행사에 모인 농민에게 점심을 사주는 것으로 대신하자"라고 했다. 그러나 행사 당일 무려 1천여명이 모여 서군수를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사진2>원회장과 김총무는 농민의 날을 11월11일로 선정하게된 계기를 이렇게 들려준다. "농민의 날을 몇월 몇일로 정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는데, 당시 농사개량구락부 임원중 한분이 가을이어야 하니 추수가 끝나는 11월이 좋겠고 11자를 한자로 十과 一이 합쳐서 흙(土)자가 되고 흙과 농민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니 土자가 겹치는 11월 11일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농사개량구락부 임원 전원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최초의 '농민의 날'을 선정 됐다.

이 행사는 매년 규모를 키워가며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이어졌다. 79년부터는 인기 연예인들이 무료로 출연해 행사를 더욱 흥이나게 해주었다. 그중 올 초에 타계한 탤런트 문오장씨는 무려 8년이나 무료로 출연해 농업인을 위로하고 자비를 털어 여러 연예인을 초빙했다. 김총무는 아직도 문오장씨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원주시농촌지도자회는 꾸준히 11월 11일을 농민의 날로 명맥을 유지해 왔지만 이날이 전국 농민의 공식적인 축제일로 자리잡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사진3>농민신문사는 1988년 11∼12월중 전국 300여 농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 농업인의 날(당시 표현은 농민의 날) 제정을 공론화(한국농정 50년사중 농업인의 날 제정경위 정장섭)했으며, 농촌지도자회와 농업기술자협회 등 15개 농민단체는 1991년 11월 31일 '농어민의 날 제정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2월 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농민의 날' 선포식 및 농정토론회를 가졌다. 같은해 12월 27일 농민단체들은 총무처에 11월 11일을 농민의 날로 제정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정부는 여러 이유를 들어 이를 보류했다.

그러나 5백만 농업인의 절실하고 끈질긴 요구에 정부는 1996년 5월 대통령령 제15005호로 11월 11일을 농업인의 날을 공식제정하기에 이르렀다.

1996년 11월 11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제1회 농업인의 날 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됐다.
1964년 강원도 원성군에서 첫 농민의 날 행사가 치뤄진지 32년 만에 농업인에 의한 농업인을 위한 농업인의 날이 만들어 진 것이다.

## 인터뷰 ## 농업인의 날 최초 제정자 - 원홍기 씨
<사진4># 요즘근황은 어떠십니까
- 중풍으로 움직임이 불편하다. 집안에서 조금씩 움직이며 소일하고있다.

# 농림부가 출간한 농정 50년사에 원회장님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는데...
- 말이 나온김에 한마디 하고 싶다. 농업인의 날을 이야기할 때 작게나마 원성군 농민의 날을 조명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자꾸 지워져서 서운한 감이 있다.

# 60년대 당시 농민의날 행사를 추진하면서 어떤 추억이 있는지...
- 지도소 공무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첫 행사에서부터 지도소 직원들이 많이 도와졌고, 또 지금까지 후배들이 협력해 잘 이끌어 나가고 있다. 추억은 많지만, 1회 행사때 군수가 사람이 많이 오리라는 생각을 못하고 참석자 전원에게 점심을 사겠다고 약속했는데, 당일 무려 천여명 가까이 모여 당황하고 영화상영으로 대체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광고나 신문매체도 없었는데 천여명이 모였다는 것은 농민들이 이 날에 대해 절실한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다.

# 농촌지도자회 활동과 농민의날 행사에 대한 기억은?
- 7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농촌지도자회지만 당시 농사개량구락부의 임원들이 지도소에서 밤을 새가며 행사를 준비했고, 김종학총무는 무려 15년간 지도소에서 먹고자다시피 하면서 농민들을 위해 뒷바라지 했다. 김 총무야말로 농업인의 날 에 대한 산 증인이다.

# 고향이 평안북도로 알고있는데 가족은?
- 평북 구성군이 고향이고, 거기서 초등학교를 나왔다. 부인과 딸이 있는데 생사 확인은 못하고 있다. 6.25때 잠깐 나갔다 온다는 것이 생이별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재혼해서 안사람과 딸과 같이 살고 있다. 지난 이산가족 방북신청을 했는데 잘 되지 않았는지 연락이 없어 안타깝다.

# 요즘 농업인이 줄어들고 있고 농산물 개방으로 농업이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잠시 상념에 잠긴 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농민을 위한 정책을 임시방편적으로 하지말고 좋은 정책을 만들어서 꾸준하게 이어가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아주 싼 이자로 영농자금을 주고 농민들의 영농계획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게끔 상환시기도 길게 해줘야 안심하고 농사에만 전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취재후기 ##

올곧게 살아온 한 평생/온갖 풍상 어려운 줄 몰랐어라/농민의 날을 만들었으니/…/모든 농민들 즐거워하고/풍요로운 오늘까지/농민들을 일깨워 주시고/말 그대로 횃불이시라

이 글귀는 원홍기선생(74)의 업적을 기리고 후세 농업인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농촌지도자원주시연합회가 92년에 세운 원홍기선생 공적비에 새겨진 글귀다.

원홍기선생은 '농민의 날'을 처음으로 제정한 장본인이다. 이북에 고향을 둔 원홍기선생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25년간 농민을 위해 희생해왔다.

역사적인 1964년 제1회 농민의 날을 진두지휘했던 젊은 농민은 세월이 흘러 이제 중풍으로 고생하는 연약한 노인이다. 원홍기 선생은 단출한 가정형편에, 부인과 외동딸 내외, 손녀와 함께 살고 있다.

그 지척에 사는 김종학선생은 반갑게 우리를 맞으며 60∼70년대 농촌지도자 활동상황을 세세히 들려줬다. 고희를 바라보는 김종학선생은 건강해 보였고 아직도 1만평 남짓 손수 농사를 짓고 있다.

농민을 위해 청춘을 바친 원홍기, 김종학선생에게 남은 건 노년의 외로움뿐. 농업에 몸담고 농업을 지켜나가야 할 우리야말로 다시 한번 '농민의 날'을 만든 두 젊은(!) 농사꾼에게 마음으로나마 고마움을 선사함이 어떨는지.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길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원회장의 쓸쓸한 모습과 한국 농업의 현실이 자꾸 오버랩되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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