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농업인·시인아궁이에 저녁 군불을 다 때고 나서 부엌 바닥까지 말끔히 쓸어 잔가지 부스러기들을 마지막으로 아궁이에 밀어 넣습니다. 깔고 앉았던 두트래방석까지 탈탈 털어서 다시 깔고 앉아 아궁이에 마지막 타는 불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때가 참 좋습니다. 나무를 집어넣을 땐 거침없이 타오르던 불도 이제 점차 사위어 가는 재속에 뜨거움을
달력을 보니 연말입니다. 버릇처럼 또 힐끗 쳐다 본 달력은 뒤로 갈수록 날짜가 호랑이 아가리처럼 커 보입니다. 그 아가리를 향해 가파른 고개를 한발 한발 넘어가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남들은 송년회니 성탄이니 해도 그저 남의 일이려니 생각해서 굳이 아쉬워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며 덤덤히 살아 왔는데 막상 연말의 이러저러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무심할 수가 없습
박 형 진 농업인·시인이집 저집 김장하는 것이 요즈음 큰일입니다. 아마도 금년 한해 마지막 일이겠지요. 초겨울의 날이 너무 따뜻했던 탓에 김장을 조금씩은 미뤘던 것 같은데 대설 지나며 춥고 궂은 날이 이어지자 아직 하지 않은 집들이 요 며칠 부쩍 서두는 것 같습니다. 시골에도 김치냉장고 없는 집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지라 옛날과는 달리 늦든 이르
박 형 진 농업인·시인운동하기 아직은 참 좋은 때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많이 쌀쌀하지만 걷고 뛰고 자전거 타기가 정말 좋습니다. 저는 여름 한 철, 덥다는 핑계로 운동을 쉬다가 가을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몸이 남보다 더 뚱뚱해서도 아니고 더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일하다가 생긴 무릎관절염 때문인데요, 아침마다 한 시간 정
박 형 진 농업인·시인친하게 지내는 누님 한분이 급하게 저를 찾는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저는 그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 보았습니다.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보았는데 무슨 급한 일일까 싶기도 했고 전화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 짐작이 틀리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인지 그 누님이나 제가, 그리고 주
박 형 진 농업인·시인아침에 자고 일어나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오다가 깨를 담아 놓은 그릇에 얼핏 눈이 갔습니다. 그런데 깨가 어제와는 사뭇 다르게 짐승 발자국도 같고 입자국도 같은 것들이 많이 생겨서 꼭 곰보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쥐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어젯밤 잠결에 희미하게 들렸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떠올렸으니까
박 형 진 농업인·시인이제 가을 일이 천천히 마무리 되어 갑니다. 농사가 잘 됐다면, 아니 작년만큼만 됐다면 아마 지금도 많이 바빴을 겁니다만 그러질 못하니 가을 일손이 조금 한가하기까지 합니다. “부실목(종기)이 커야 고름도 많고 건지가 많아야 먹잘 것도 많은 법”인데 농사규모가 적으니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둘러보면
엊그제는 나락을 베었습니다. 늦게 심은 탓에 베는 것도 많이 늦어졌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심어도 벨 때는 거의 같이 베게 되는 것이지만 금년엔 유달리 제 것만 늦었습니다. 모내기를 하고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제초제 대신 우렁이를 넣었는데 웬일인지 금년에는 우렁이가 어찌나 식욕이 왕성한지 풀은 물론이거니와 벼까지도 많이 갉아 버렸습니다. 그 갉은 자리에서 새
벌써 두 번째 국화(구절초)밭에 꽃을 따고 양파모판의 풀을 뽑습니다. 낮 시간이 길고 기온이 쨍쨍할 때엔 이파리만 무성하던 것들이 밤이 길어지고 일교차가 커지자 어느새 꽃대궁을 밀어 올리며 몇 만 송인지도 모를 흰 꽃들을 피워냈습니다. 시월 한 달 내내 그 국화를 따내는 게 제일 큰일입니다. 국화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피를 맑게 해서 여성들의 월경불순,
박형진 농업인·시인어제는 깨를 베었습니다. 다른 해 보다는 조금 늦은 6월 20일께 심은 것입니다. 저희 지역에서 깨는 보통 6월 10일 쯤에 심어 장마가 오기 전에 어느 정도 키워놓습니다. 그래야 비 피해를 덜 보게 되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때쯤 무슨 일이 바빠서였는지 깨를 늦게 심었고 싹이 나자 곧바로 장마가 들이닥쳐 괜히 헛고생만 했는가
요 며칠 사이에 우리 동네는 두 번이나 초상이 났습니다. 한 사람은 병중에 오래 있었고 나이가 많아 이미 예견된 것이었습니다만 나중 사람의 상은 근래에 보기 드문 어이없는 것이었습니다. 복어를 잘못 먹은 사고였던 것입니다. 저는 그 연락을 받고 놀라서 한동안 정신이 멍했습니다. 그가 제 절친한 한 동네 꾀복쟁이 친구의 동생이라는 것과 또 그가 복어를 늘상
박 형 진 농업인·시인고구마 캐고 옥수수 따다 쪄먹는 때입니다. 예년 같으면 벌써 두서너 번 쪄먹었을 터인데 금년엔 철 세가 늦어 이제 처음입니다. 그동안 얘들은 “고구마 언제 캐?” “하나만 캐 보자”고 여러 번 졸랐습니다. 옥수수는 꽃이 피고 자루가 굵어지는 게 눈에 보이기 때문에 묻지 않습니다.
박형진 농업인·시인심은 지 이십 일 가까이 되니 배추는 이제 땅 맛을 알고 제법 자라 이파리가 어른 손바닥 만씩 합니다. 처음 심었을 때에는 물을 서너 차례나 주었어도 몸살을 하느라 이파리가 한두 장씩은 시들고 꼬실라지기까지 하던 것들입니다. 이제 그럴 염려야 없어졌지만 하루에 한 번, 포기포기마다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며 벌레 잡는 일이 걱정
박 형 진 농업인·시인오늘은 문을 바릅니다. 잦은 비 뒤 끝에 날마다 푹푹 찌는 무더위가 사람을 못살게 괴롭히더니 그것도 시나브로 물러가고 이제 선선한 바람과 맑은 햇살이 내리쬡니다. 이런 날이 문을 바르기에는 좋은 날씨지요. 저희 집은 방 세 칸에 거실 대청 골방 부엌과, 마루와 토방이 있는 서른 평 넓이의 흙벽돌집인데요, 발라야 할 창호문만
박 형 진 농업인·시인어느새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늦더위가 채 숙어지지 않아서 여름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는데 시간은 아랑곳없이 처서를 넘어 내일모레 백로를 향해 치닫습니다. 달력을 무심코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만 “아이쿠!” 소리가 입에서 나옵니다. 추석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