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농업인·시인‘드디어 수도를 놓았다.’ 이것은 물 때문에 늘 애성을 바치는 제 아내의 소원풀이 말이고 ‘기어이 수돗물을 집까지 끌어왔다’는 말은 비싼 돈 들여서 수도 놓는 것을 그다지 탐탁찮게 생각했던 저의 표현입니다. 마을에 수도가 들어 온 것은 약 15년 전인 것을 생각하면 저희가 수도 없이
박형진 농업인·시인하루 종일 봄비가 내립니다. 기상청의 발표로는 5밀리미터 안팎의 비가 온다더니 보슬보슬 시작한 비가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거듭하며 30밀리미터도 더 온 것 같습니다. 이제는 꽃샘추위도 다 가버린 듯 춥지도 않고 바람도 없습니다. 산의 나뭇잎은 중턱을 넘어 꼭대기로 그 연둣빛 물결을 끌어 올리고 점점이 등불처럼 박힌 산벗꽃들은
박 형 진 농업인·시인마늘밭 검정고자리가 정말 끝까지 속을 썩일 모양인가 봅니다. 꽃샘추위가 닥쳐오면 비닐 구멍 속 땅으로 들어가고 반짝 따뜻한 날이 시작되는가 싶으면 위로 기어 나와서 마늘대궁과 이파리들을 갉아먹기 시작하는데 그러는 동안에 마릿수가 늘고 몸집이 커져서 온 밭이 이제 고자리 천지입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무렵에 등에 지는
박형진 농업인·시인하루 종일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해 어스름 때 집에 오니 집사람이 마루 끝에 앉아 있는데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약간 얼이 빠진듯했습니다. 일어나서 반갑게 맞이하지는 않는다 해도 “이제와?” 말 한마디는 건넴직한데 그것조차 없었습니다. 감춰진 속마음은 하여간에 겉으로 드러나는 아내의 심기조차 살
박형진 농업인·시인드디어 비닐하우스를 다 지었습니다. 일품을 따져보니 꼭 열 명, 즉 열흘의 시간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걸 새로 짓는다면 두 명이 사흘정도 하면 될 것 같은데 뜯어둔 것을 꼭 그대로 다시 지으려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부속 자재를 사다 쓰지 않으려고 해체한 것마다 번호를 매겨두었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 조립하느라 특히
박 형 진 농업인·시인작년에 뜯어두었던 비닐하우스를 자리를 옮겨 다시 지었습니다. 아니, 짓고 있는 중입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산 아래로 난 길을 따라서 하우스 하나 칠만한 정도의 빈 땅이 있는데 거칠고 속에 돌이 많아도 제 땅 중에서는 바람의 피해를 가장 덜 받을 곳이기에 거기에 짓는 중입니다. 그곳에 서있던 은행나무는 얼마 전에 베어내고
박 형 진 농업인·시인하루 종일 방에 한 번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종종거리고 돌아다녔어도 저녁때가 되니 무슨 일을 해 놨는지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조금 조금씩 한 일이라 그러겠지요. 아침을 먹고 나서 오늘은 나무부터 몇 그루 심는 것으로 일을 시작 했습니다. 전날 비가 와서 어차피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읍에 있는 묘목 시장에 구경 겸
박형진 농업인·시인책상을 하나 새로 만들었습니다. 글 쓴다고 나댄지가 20여 년이지만 반듯한 책상 하나 갖지 못했습니다. 늘 엎드려 쓰거나 밥상 펴 놓고 쓰기 일쑤였습니다. 밥상위에 널린 공책 연필들 치우기 싫으면 그대로 펼쳐두고 끼니 밥은 방바닥에 신문지 펴 놓고 먹어버릇했습니다. 밥 먹는 곳이 방이다가 마루이다가 때로 부엌 아궁이 불 앞에서
박형진 농업인·시인둘째 형님의 큰 아들이 결혼해 딸 셋을 낳았는데 오늘이 셋째 딸 돌이라고 식구들끼리 저녁밥이나 함께 먹자고 건너오라고 하는군요. 낳았다고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돌이라니,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에 새삼 놀라 가슴속에서 무엇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랫동네 사시는 큰 형님네 식구들까지 모두 한자
박형진 농업인·시인삼월이 됐는데도 아직 일을 손에 잡지 못했습니다. 겨우내 놀기만 했던 버릇이 몸에 밴 탓이지요. 하지만 놀기만 한 것도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겨울은 유난스러워서 밖에서 일을 할 만큼 따뜻한 날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12월 초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과 추위는 1월이 가고 2월도 중순이 지나서야 조금씩 누그러지기
박형진 농업인·시인대보름 날 아침입니다. 어제도 날씨가 참 맑고 좋았는데 오늘은 더 좋아지려는지 온 누리에 서리가 하얗습니다. 방문 밖이 희뿌예져서 일어난 시각이 여섯시 반, 서둘러 옷을 주어 입고 부엌에 나와 불을 지핍니다. 아내도 바로 뒤를 따라 나오네요. 대보름날은 해뜨기 전에 밥을 먹고, 더위를 팔고, 아홉 집의 밥을 얻어 와야 하고,
박형진 농업인·시인춘첩을 붙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일 년 내내 쳐다봐도 좋은 글귀입니다. 해마다 똑같은 글이어도 새로 써 붙이고 바라보면 더 새록새록 느낌이 살아옵니다. 먹을 갈고 알맞은 크기로 종이를 자르고 잘 된 글씨를 얻기 위해 몇 번이고 써 보는 동안 그 글의 뜻이 마음속에 아로새겨졌기 때문일 겁니다.저희 집은 대문이 없어서 춘첩을
박 형 진 농업인·시인날이 좀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지붕위에 한 뼘도 더 되게 얼어있던 얼음이 녹아 추녀를 타고 흘러내립니다. 밤이 되어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지 낙숫물 소리는 내내 그치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겨우내 문틈으로 스며들던 시린 바람도 들어오지 않아 새벽녘에 아랫목을 파고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방문이 희뿌윰해져서 버릇처럼 문을
박 형 진 농업인·시인드르륵, 문을 열고 정지에 들어서자 고구마 익는 다디단 냄새가 가득합니다. 점심밥 먹을 시간이 가까이 되는지라 저는 그 냄새에 끌려서 아궁이에 넣어둔 고구마를 하나 꺼내어 껍질을 벗겨 듭니다. 타지 않고 노릇하게 잘 익은 고구마를 이손 저손으로 옮겨 쥐고 호호 불며 한입 베무니 뜨겁고 부드럽고 다디단 것이 입안에 가득 차는
박형진 농업인·시인12월초부터 시작된 눈이 해를 넘겨서 한 달 넘게 이어집니다. 옛날에도 이런 일이야 해마다 되풀이되긴 했지만 근년에는 드문 일입니다. 실제로는 눈 온 날이 오지 않은 날보다 많지 않지만 날씨가 추워서 내린 눈이 녹지를 않으니 온 세상이 온통 눈뿐입니다. 이제까지 하는 걸로 보아 이런 날씨는 입춘 넘어 봄이 올 때까지 이어지지
박 형 진 농업인·시인며칠째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날리다 멎고 또 날리다 멎고 하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멎을 생각을 하지 않고 줄곧 퍼붓습니다. 눈발이 굵어서 날은 그리 춥지 않지만 요즈음 며칠은 참 매섭게 추웠습니다. 햇발이 비추는 낮에 잠깐씩만 추녀의 고드름이 녹아 흐를 뿐 밤이면 다시 더 딱딱하게 얼음이 얼었습니다. 하여 뒤란 처마 밑에
박형진 농업인·시인아주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다가 그것이 무너졌을 때의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젊었을 때는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의 크기가 더 강하고 커보였어도 쉬이 사라졌지만 나이 먹으니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통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것은 이렇다 하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가슴 저 밑바닥에 깊이 자리 잡고 앉아 위로 받아
박형진농업인·시인아는 사람으로부터 맷방석 하나를 짜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저를 소개한 것이었으니 실은 제가 모르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맷방석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짐작컨대, 귀농이나 귀촌을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기계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것과 음식에 관심이 많겠다는 것이 느껴져서 친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 형 진 농업인·시인이틀 동안 집 옆의 산에서 나무를 했습니다. 지난 가을에 몰아친 두 번의 태풍 탓에 산의 나무들이 수없이 부러지고 찢겼는데 그게 이제 죄다 말라서 불 때기 좋게 되었습니다. 톱도 필요 없고 낫도 필요 없이 밑에 흩어진 가지들을 주워 모아서 한 아름씩 나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세 아름씩 한데 모아 묶으면 한 다발이 되지만
박형진 농업인·시인오늘은 이상하게도 참 한가하단 느낌이 듭니다. 할 일이 없어서도 아니고 날이 궂어서도 아닌데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왜 그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분간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면도하고 머리감는 귀찮은 일 따위에 신경 쓸 것 없고, 간밤에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일하기에는 좀 뭣한 날이긴 합니다. 그러면 이럴 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