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어른, 아무래도 사태가 심각합니다. 우창에서 묵은 빚에까지 이자에 이자를 쳐서 받으니 물건을 받기는 커녕 돌아갈 경비도 없겠습니다. 몇 년 눈감아 주다 이번에 묵은 빚까지 받으려고 나서는 것을 보니 방주 어른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동방 방주는 안색이 굳어있는 대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한결 같이 분하고 원통해 치를
동방 방주 엄홍을 따르는 추종 세력은 한밤이 지나는 것도 잊은 채 서성이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도담 강가에 백여 명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다행히 이탈자는 없어 보였다. 아침을 간단히 끝낸 일행은 각자 끌고 온 나룻배나 말, 나귀 등을 끌고 하방리로 향했다. 해지기 전에 도착을 해야 우창에 등록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서류 정리 및 개인 상거래 내용
매포 포구에 몰려있던 동방 무리에게 무거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해동 무리가 단양 하진 포구에 모여 있다는 소식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매포 포구로 와야 할 터였다. 하진 포구로 갔다는 것은 동방과의 손을 끊겠다는 무언의 의미였다. 또한 우창과 손을 잡았다는 뜻이기도 했다.죽령에서 산적의 습격을 받아 우두머리들이 죽고 나머지는 혼비백산 목숨을 건졌다고 하지만
단양 고을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 나갔다. 죽령에서 풍기 아전이 도적 떼에게 당했다느니, 해동 보부상이 몰살을 당해 시체 썩는 냄새가 죽령 골짜기에 가득하다느니, 우창의 도주가 자신한테 반기를 드는 보부상을 여강에 처넣었다는 등 해괴망측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러자 단양 관청에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서 각처에 아전을 보내고 이방은 휴
생기동에는 새벽이 되어도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산중에 숨어살기 때문일 것이다. 준량은 따사로운 햇살에 일어났다. 높은 곳이라서 새벽을 알리는 햇살이 유난히 빠른 것 같았다. 토정이 끙끙 앓는 신음소리를 냈다. 준량은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과 머리카락이 뒤엉켜 있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칠석날인 오늘은 바람도 선선하니 날씨가 매우 좋았다. 저녁 별들이 어두운 밤하늘에서 보석처럼 빛났다. 바우는 산짐승이 오지 못하도록 몇 군데 바위를 굴려 세우고는 조그마한 모닥불을 피웠다. 칠흑처럼 어두운 계곡 사이로 요란하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빠끔히 하늘만 보이는 곳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서로 경쟁하듯 반짝반짝 아른거렸다.늦
펄펄 날던 무관이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돌무더기를 의지하며 흐느적흐느적 걷는 폼이 영 안쓰러워 준량은 고개를 돌려 멀리 도락산과 주변의 산들을 응시하였다. 소백과 태백이 만나는 지점에 용호산쟁이 뚜렷하고 두 마리의 용이 솟구치는 토산이 확연하게 대립하는 지형이 이곳을 중심 삼아 펼쳐지는 것 같았다. 준량이 보기에도 길지임이 틀림없었다. 옅어진 안개가 층을 이
준량은 이틀이 지나자 붓기가 다소 가라앉고 조금씩 말을 할 수 있었다. 옻이 크게 올랐지만 생기동에서 나는 느릅나무 진액을 바르고 달여서 뿌리자 붓기가 빠진 것이었다. 구덩이 속에서 있던 무관과 장사는 독기로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튼튼한 몸이었기에 망정이지 약골 같았으면 목숨을 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밖을 내다보며 주변을 살펴보던 토정
“대체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거냐?”노루와 영주 무리들 뒤쪽에서 벼락같은 노도 소리가 울려왔다. 놀라서 뒤를 보니 언제 내려 왔는지 촌장이 호통을 치며 올라오고 있었다. 모두가 멈칫거리며 무기를 내려놓았다. 주춤거리면서 노루가 촌장 앞으로 가자 촌장의 손이 노루의 뺨을 후려쳤다. 노루가 풀썩 주저앉자 촌장이 영주를 부른다. 영주가 무
“이놈들 아무리 산중 무리라지만 사람 목숨 귀한걸 알아야지. 이놈들.”노루가 함정 쪽으로 오는 것을 본 영주가 노루를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너는 뭐 하러 내려왔어? 이놈들은 죽여 버려야 돼. 상관하지 마.”그때 구덩이 속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고함 소리에 노루는 멈칫했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생기동의 아침이 밝았다. 싸리담장 안으로 여러 명이 모여 있다. 아침 해가 뜨기 전이라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젊은 대장 영주가 촌장을 보고는 머리를 조아렸다.촌장은 어젯밤 늦게 대강 얘기를 들은 터였다.“누구인지 알겠느냐?”“모릅니다. 한 놈은 정신이 있던 터라 돌담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우두머리 같은데 독기가 퍼졌는지 퉁
고향을 잊지 못해 자신의 기명도 두향이라 지은 어린 두향을 자기 고향 두향리가 올려다 보이는 강선대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가끔씩 강선대에 오곤 했는데 퇴계가 부임하고서는 퇴계와 함께 강선대에 오곤 했다. 퇴계는 어린 기녀 두향을 특히 어여삐 여겼던 것이었다.“저희 영감님께선 손님을 맞고 잠시 후에 오신 답니다.”“그래 기
준량은 매사에 합리적이고 관리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또 준량은 조정에 근무하면서 지번을 스승처럼 따르고 지함과도 가깝게 지냈다. 동년배인 준량과 지함은 같이 동문수학한 막연한 사이였다. 지번은 토정도 준량처럼 벼슬길에 오르길 소원하였다.“형님, 구담봉 명당 터는 당대에 정승이 줄줄이 나올 터입니다. 조상의 묘를 이장하게 해주세요. 제가 틀림없는
조정관아 외면한 채 주역에 빠져 전국 각지 돌아양반과 탐관오리의 횡포에 도적이 되어 산중을 떠돈 그들은 기쁨 반, 두려움 반, 설레는 마음을 다 잡을 수 없었다. 이곳을 떠나 고향도 아닌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내일이면 죽령고개의 도적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었다. 먼 산 너머 아득히 보이는 치악산이 그리움으로
모내기의 효과는 수입 면에서 탁월했다. 한 마지기 한 섬의 쌀이 나왔다. 이것은 엄청난 양이었다. 농민들은 이제 굶주림의 고통에서 한시름 덜까 했더니만 소득이 늘은 만큼 세금도 같이 늘기 시작했다. 종전에는 다섯 마지기 당 백미 반섬이었는데 올해부터는 백미 한 섬으로 늘린다는 소문이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세금을 내자니 눈앞이 캄캄한 게 수확도 하기 전에
특히 싸리나무와 비자나무는 어렵게 구해 쌓아 놓아도 팔리지 않았다. 우창이 한양 목상들에게 상권을 넘겨준 다음부터 일어나는 현상이었다.막대한 이문이 남는 나라의 중요산업인 목재 경기가 없어지자 불만을 토로하는 떼상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기존 떼상의 일거리가 한양 목상에게 넘어가자 운반권을 가졌던 자는 저절로 소외됐고, 반기를 든 몇 명은 원인 모를 사고로
젊은 선비의 당당함에 웅성거리던 소리가 줄어들었다. 선비는 한술 더 떠 아전에게 물었다. “근데 오늘이 무슨 날인데 이렇게 사람이 많소?” 젊은 선비의 당당함과 뒤따르는 무리를 보니 어느 대감의 자제가 분명한 듯 했다. 형방이 기가 죽어 말했다.“예, 며칠 있으면 우창에서 도방회의가 열립니다.” 또 한번 채찍이 허
풍기 용바위골 주막에는 도방회의 전날부터 상인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모여 죽령고개를 넘어야 안전하다면서 사람들이 더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그 와중에도 우창의 회유와 압력에 넘어간 무리와 해동의 무리와는 자연히 거리감이 생겼고 따로 죽령을 넘어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렇다고 해동 무리가 도방회의에 불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