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만큼 빠른 건 없습니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세상에서 이보다 빠른 건 없노라고 뭘 내세워 받자 어디 세월의 속도와 견줄 수나 있겠습니까. 과학자들이 지구의 자전속도가 적도에서 대략 시속 1,700km라고 밝혀냈으니 과학도 세월의 빠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요.자기 나이에 km를 붙이면 그게 세월의 속도라는 우스갯소리처럼 어 어 하다가 벌써 한해가 다 가고 말았습니다. 산속 외딴 집을 떠나 처마 끝이 마치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듯한 마을로 이주한지도 어느새 1년여가 다 되고 그사이 벌어졌던 이런저런 일들도 다 지나간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임 이장이 재판을 받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는 얘기도, 그로 인해 새롭게 이장이 되겠노라고 서명을 받아갔던 펜션 텔 사장도 불과 2개월 여 만에 이장 직을 사임했다는
오래전부터 선인들이 사용해오던 농기구는 지금까지도 별다른 모양의 변화 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낫이나 호미, 괭이, 삽은 용도에 따라 조금씩 모양의 변화는 있어 왔지만 그 전통적 형태의 변화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낫을 예로 들어봐도 전통적인 조선낫은 일단 묵직한 손맛이 좋고 작은 나뭇가지 정도도 벨 수 있을 정도로 날이 두텁지만, 풀을 베기에는 적절치 않아 개량낫이 나와 있는 정도지 뭔가 획기적으로 변화는 없는 상태입니다.인터넷 유투브를 뒤지다 긴 장대에 달린 낫과 예초기와의 풀베기 시합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놀랍게도 장대낫으로 풀을 베는 이가 압도적으로 이기는 동영상을 보고 국내에도 판매하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가시질 않았었습니다.사실 예초기는 휘발유나 윤활유를 잘못 사
마지막 가을걷이라고 털어낸 게 들깨지만 제대로 심질 못했으니 얼마나 수확할 것인가는 애당초 기대 밖 일이었습니다. 가뭄 속에 억지로 정식한 거 조금에다 여기저기 씨앗이 떨어져 저절로 자란 돌 들깨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걷어 들인 게 겨우 한말이 될까 말까할 양이었으니 어디 가서 차마 농사짓고 있노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성적푭니다.철부지처럼 또 김장배추를 늦게 심은 탓에 올해도 어김없이 배추는 짧아지는 햇살처럼 자라다 말았습니다. 그나마 쪽파가 잘 자라줘 올 김장때 쪽파 값은 들지 않아 겨우 체면치레는 한 셈이지만 어째 해가 갈수록 농사짓는 솜씨가 늘기는커녕 점점 힘만 드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잡초들도 어김없이 차가워지는 바람에 제 몸 색깔을 빼앗기며 바닥에 누워버려 베어낼 시기는 놓치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
이럭저럭 이곳으로 이사 온 지도 6개월여가 흘렀습니다. 마을회의도 두 차례나 참석하긴 했지만 아직도 길가에서 만나는 이가 어느 골목에 사는지 모른 채 그냥 어색한 목례로 지나치곤 합니다. 사실 인사 나눴다하더라도 금방 잊어버리는 나이가 됐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단단히 마음먹고 머릿속에 넣지 않는 한 그이의 신상명세를 꿴다는 건 이제 불가능합니다. 이러니 계속 모르고 지내다보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지라 뭔가 대책을 세우긴 세워야 할 판입니다.사람들과 가장 빠르게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은 밥을 같이 먹는 일일 겁니다. 하기야 이사 와서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도로 건너편에서 미니 슈퍼를 운영하는 반장(나중에 안 일이지만)이 집들이를 언제 할 거냐고 묻는 바람에 속으로 깜짝 놀라기는 했습니다. 그전
정글처럼 자란 풀을 베어내고 헉헉거리며 일궈 낸 김장 채소밭에 배추모종 30포기와 무씨와 총각무 씨를 파종하고 나니 또 비가 하염없이 내립니다. 김장밭이라고 모양을 갖추려면 쪽파도 심어야겠기에 종묘상에서 팔지 않는 쪽파를 사기 위해 북평장까지 나갔었습니다. 매년 가격이 오르기는 하지만 올해 가격은 작은 됫박에 5천원이나 합니다. 작년만 해도 4천원이었으니 무려 25%나 인상된 셈입니다. 하기야 오르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길러 내기도 힘든데 너무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그냥 사다가 심을 밖에요.농사짓기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환경인데 정부정책은 누가 정권을 잡든 매 한가지인 것 같으니 아무리 농업이 미래의 블루오션이라고 주장한들 쉽게 수긍할 수 없는 게 현
참 힘든 여정입니다. 초봄에 이사를 하고 새 농지를 임차해 틈틈이 감자까지 심을 때만해도 올 농사를 망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봄 가뭄이 심했지만 그래도 여러 차례에 걸쳐 포트에서 키운 옥수수 모종이나 토종오이는 물론, 시장에서 구입한 땅콩 모종, 먼저 집에서 파서 옮겨 심은 삼채도 마을사람 눈치 보면서 물을 길어 겨우 키워 놓았으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겨우겨우 옥수수 좀 수확하고 나서부터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모든 걸 망쳐놓았다는 거지요.이미 이것저것 심어놓은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밭에 들깨나 심으리라고 모종을 냈습니다만 워낙 날이 가물어 싹 틔우는 시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옮겨 심을 만큼은 자라야 할 모종이 겨우 싹을 틔울 무렵 계속되는 빗줄기에 제대로 풀을 매주지 못했더니 그만 풀숲에
이사 온 동네에서 두 번째 마을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워낙 날이 뜨거워 새벽녘과 해가 질 무렵에만 밭에 나가게 됩니다. 그날도 집사람과 함께 저녁 무렵 밭에 나가 오이라도 딸 게 있나 살피고 있는데 밭주인 아주머니가 헐떡거리며 다가와 마을회의가 있으니 회관으로 빨리 가자며 재촉해 일단 저만이라도 가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한집 건너 마을회관이 있지만 지난 번 마을회의 때 들어가 보고는 다시 갈 일이 없어 지나치곤 했는데 이번에 보니 안이 상당히 넓더군요. 하기야 지난번에야 어디 제대로 훑어볼 여유나 있었겠습니까, 그냥 앉아있다 나온 셈이니 뭐가 어디 있는지 보질 못했으니까요.지난번 회의도 얼떨결에 참석했었는데 이번에도 미리 회의가 열린다는 정보도 없이 땀에 절은 모습으로 어설픈 웃음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면서
농사일이 시작되는 봄철 지독한 가뭄으로 고생하더니 장마랍시고 빗방울은 흘낏거리다 창밖으로 사라져 큰일이구나 걱정했더니 웬걸, 그나마 물 길어 나르며 고생해서 키워놓았던 고추랑 토마토, 가지 등을 돌볼 새도 없이 비가 2주가량 퍼 부니 모든 게 엉망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농약 안 치고 화학비료 안 주고 고추를 키우는 일은 관행농법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기는 게 보통의 생각입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동해에서는 농약분무기 20리터 한 통에 매실액 100미리리터와 사과식초 100미리리터를 섞어 비온 다음 날 고추에 살포해주면 탄저나 기타 해충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완벽하게 벌레를 잡거나 탄저가 전혀 안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겉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였으니 이 방법이 농약도 비료
긴긴 가뭄을 딛고 감자를 캤습니다만 이게 어디 수확의 기쁨이라고 말하기는 남세스러울 정돕니다. 이사하기 전 얻어온 씨감자 반 박스 정도 심었는데 콩알만 한 것까지 다 합쳐 겨우 40kg가 살짝 넘었으니 아무리 가뭄이 심했더라도 너무하다 싶더군요.조금 더 있다 캘 걸 잘못 했나 싶었다가 그래봤자 얼마나 더 굵어질까 괜한 욕심이지 잘못하면 장마와 겹쳐 제대로 캐지도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그만만 해도 다행이란 생각입니다.이사 온 집은 집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제외하곤 전부 나무와 화초가 차지하고 있어 마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러니 뭔가 수확해도 죄 거실로 가져와 펼쳐 말릴 수밖에 방도가 없습니다. 반나절 햇볕에 말렸던 감자를 손수레에 싣고 거실바닥에 안 쓰는 이불호청을 깔고 싣고 온 감자를 잘 펼쳐
가뭄 끝에 장마가 시작됐지만 장마라고 뉴스에서 얘기하니 그런가 보다 할 정도로 비는 오는 둥 마는 둥 지루하게 지나가더니 그만 밭만 순식간에 잡초들 세상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찔끔거리는 비로 인해 밭에 나가 일할 타이밍을 놓쳐버려 밭주인에게 미안할 정도로 밭 전체가 정글이 되니 그만 들깨 모종을 심을 의욕마저 잃게 됐습니다.장마가 끝나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헉헉거리는 무더위가 찾아왔습니다. 이러니 더더욱 일할 시간도 부족해 겨우 새벽녘에 나가 어느 한 귀퉁이만 풀 베다가 해가 떠오르면 일단은 철수합니다. 나이도 들어가지만 온열병에 걸릴 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것도 모른 채 풀베기에 열중하다 심장이 벌렁거리며 숨이 찬 증상을 경험한 뒤로는 일단 해가비치면
낯선 곳에서 그 마을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면 꽤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좌우는 물론 전후까지 거의 지붕이 맞닿을 정도로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어 모든 움직임에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마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다행이라면 대문 앞은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폭이 넓은 도로로서 멀리 건너편 집을 제외하고는 신경 쓸 일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유명관광지가 가깝기도 하지만 원래 이 마을은 30여 년 전 폐쇄된 탄광촌 마을이었던 탓에 농사짓는 이들이 별로 많지 않은 곳입니다. 하천부지와 철도부지가 혼재된 마을에 저처럼 땅과 집을 등기해서 소유하고 있는 이가 드물어 행동거지는 물론 TV소리까지도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됩니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주택은 대부분 지상권주택이지만 그로 인한 불편함은
빌린 밭과 인접한 모텔 사이에는 매실과 자두, 그리고 서양앵두 등 과실수들은 물론 엄나무 같은 가시가 많은 나무, 메타스퀘어 같은 키 큰 나무들이 경계선을 이루고 있습니다.집에서 밭까지 도보로 3분 정도 거리지만 마을과 돌아서 있어 밭에서 일하는 이가 없을 때는 인적이 없어 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기차가 지나는 높은 둑길 아래로 폭 3미터 비포장도로가 둑길과 나란히 이어져 있고, 그 왼쪽으로 밭도 나란히 펼쳐져 있습니다.평일에 지나는 기차와 휴일에 지나는 기차는 운행간격 차이가 많습니다. 평일에는 1시간에 한 대꼴로 지나지만 휴일에는 평일보다는 대략 40% 정도 운행횟수가 느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밭일을 하다보면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걸릴 때가 많은데 기차소리는 잠시 쉬
먼저 살던 동해시에는 우리나라 5대 장 중 하나라는 북평장이 매월 뒷날이 3이나 8로 끝나는 날 북평 일대에서 상당한 규모로 열립니다.시골 살면서 장날이 기다려지는 건 장터를 어슬렁거리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장터에서 이 좌판 저 좌판 기웃거리다 잔치국수 한 그릇이나 메밀전병 한 접시 시켜 허기를 채우는 게 전부이긴 하지만 괜히 장날이 언제가 헤아려 보는 건 시골살이가 꽤 됐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간선도로는 물론 나란한 골목길까지 온갖 상품과 먹을거리 좌판이 가득한 북평장에서 맥없이 걷다간 길에 가득한 인파에 떠밀리려 다니기 십상입니다. 전문적인 장사꾼은 물론 인근 할머니들 좌판까지 다 돌아보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릴 일입니다.봄철 모종이 장에 나오는 시기에는 인근 농사꾼
농산물품질관리원이 주관하는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기 위해 밭 임대차계약서를 들고 강릉사무소를 찾아 갔었습니다. 지자체별로 차이가 있음은 알았지만 먼저 살던 동해시에서는 요구하지 않던 농자재구입영수증이라든가 이웃들로부터 농작물을 경작하고 있다는 확인서가 필요하다는 말에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아 알았다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사실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봄철 배당되는 가축분 퇴비를 시중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가 농지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이야 당연히 여러 가지 농업인으로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저처럼 농지를 임차해서 경작하는 입장에서는 별다른 혜택을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제출해야 할 서류가 생각지도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밭주인이 농관원 콜센터에 전화해 땅을 임대해 줬
지난 해 11월부터 시작된 농가주택 답사는 올 3월이 돼서야 겨우 그 끝을 맺을 수 있게 됐습니다. 가능하면 아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서울과 가까이 가려고 전국의 수많은 농가주택들을 답사했지만, 결국 이런저런 조건들 중 그나마 한두 가지라도 충족시킬만한 곳으로 낙점한 데가 강릉시 변두리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깊은 산속 외딴 집에 대한 로망은 이미 버린 지 오래 됐지만, 집들이 다닥다닥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마을로 들어와 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습니다. 나이 들어 너무 외딴 곳에 살다보면 불의의 사고나 병들어 힘들 때 대처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생각도 들고, 주위에서도 사람들 속에서 살 때가 됐다는 적극적 충고도 이곳으로 결정짓는 요인이 되었습니다.물론 이 외에도 전 주인이 작은 대지를 활용해 20평집을 제외한
470평 새로 빌린 밭은 네모반듯한 경사가 없는 땅입니다. 전에 살던 곳 밭은 워낙 경사가 있었던 터라 일하는 자세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수시로 바꾸지 않으면 허리에 무리가 갈 정도였는데 지금 밭은 경사가 없다보니 횅하니 더 넓어 보입니다.밭주인이 나이도 들고 허리가 아파 더 이상 농사짓기가 힘들다며 임대로 내놓은 밭 가운데로 이미 이웃사람이 마늘밭을 만들어 놓아 자연스레 구획은 됐지만 어디에 무얼 심을 까는 고민거리가 됐습니다. 이삿짐을 옮기기 전 옆집 밭과 경계지점에 감자밭을 일부 만들고 대략 100여 평 정도에 전에 살던 곳 이웃으로부터 얻은 도라지 씨를 뿌려 놓았지만 여전히 밭은 횅하니 넓기만 합니다.농사는 시기가 중요한데 이사와 겹치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모종을 심고, 씨를
분리수거를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최종 수거당국에서 모조리 허접한 폐기물로 처리한다면 분리수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하기로 결정하고 보니 지난 5년여 원래 살림에 보태진 각종 살림살이들이 엄청납니다. 종이박스나 신문지, 비닐봉지 등은 혹시나 쓸 용도가 있을 거라는 미래 예측으로 이곳저곳에 모아놓은 게 이렇게나 많은지 놀랄 정돕니다. 헛간은 물론 다용도실로 사용하는 방 두 곳에도 양파 망이나 매실 망 등이 가득합니다. 그러고 보니 시골살림이란 게 이처럼 언젠가는 쓸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쓰레기조차 버리지 못해 집안이 늘 어수선하고 지저분해집니다.재활용품을 모아 버리는 나일론포대도 10여 개 구입하고, 50리터 쓰레기봉투도 몇 개 사와 집안 곳곳 쓰레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헛간 두 곳부터 정리하
눌러앉을 것인가, 새 보금자리를 찾을 것인가라는 갈등 끝에 결국 새 보금자리를 찾자는 쪽으로 결론을 냈습니다. 실상 돈도 많이 들여 수리도 했고, 자연환경이 이곳만한 곳도 그리 흔치 않은지라 휙 떠나는 게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집주인의 은연중 갑질이 도가 지나쳐 떠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굳힌 겁니다.지금이야 농촌실상이 어떤지 웬만한 것은 알게 됐지만, 처음 이곳에 올 때만해도 거의 무지한 입장이어서 내 돈 들여 수리하고도 보증금은 보증금대로 내고 집세는 집세대로 일 년치 선세로 내고도 그게 불공정거래행위인지도 몰랐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지요.아마도 떠나자는 마음을 굳히고 전국을 도는 농가주택답사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이게 내 팔자려니 하고 그냥 눌러 앉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길 건너 벽돌
사람이 살아가는데 도시든 시골이든 물만큼 중요한 자원은 없습니다. 물이 부족해 겪은 불편함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마당 한편에서 솟아나는 샘물에 반해 안정적 물 공급에 대한 확인 없이 덜컥 이곳에 자리 잡은 대가를 톡톡히 치루기 시작한 것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서부터였습니다.한평생 샘물이 마른 걸 보지 못했다는 건너편 집 토박이할머니의 증언도 소용없이 샘물통의 물은 지독한 가뭄에 견디질 못해 빨래는 고사하고 먹는 물마저도 없을 정도로 말라붙어 버리니 샘물에 혹해 이곳을 선택한 것은 오롯이 제 탓이니 누굴 원망하겠습니까.계곡물이나 자가 지하수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몇 가구 안 되는 주민들을 위해 시 수도과에서 관정을 뚫는 공사가 시작된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
우편물 함에 농업기술센터가 발신인으로 돼 있는 편지봉투가 꽂혀있어 개봉하니 밭농사 직불금을 신청하라는 공문과 신청방법 등이 기재돼 있었습니다. 논농사나 밭농사 직불금에 대해 실상 별다른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대규모 농사를 짓는 이들이나 목돈이 되지 저처럼 임차해서 작은 규모의 밭을 일구는 사람에게는 귀찮기만 한 일일 수도 있어 그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당 밭직불금이 45원이니 평당(3.3㎡)148원50전, 제가 임차해서 밭작물을 재배하는 면적이 대략 600평쯤 되니까 얼추 계산해 봐도 89,100원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한번 신청이나 해볼까라는 마음으로 일단 직불금 신청을 받고 있는 주민센터를 방문했습니다. 동네별로 일정 일시를 정해 기술센터와 농산물품질관리원이 합동으로 신청을